일상
펌을 했다. 육 개월 만이다. 안산까지 가서 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곳에 사는 동생을 볼 수 있고 펌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용실에 일 년 동안 두 번 간다. 모두 언니처럼 한다면 미용실 다 망하겠다. 동생의 말이다. 커트는 집에서 혼자 한다. 대충. 길고 거슬리는 것만 눈썹 손질하는 면도칼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인데, 신기한 일이라고 남편이 놀리곤 했다. 나는 스님이 아니니까 깎을 수 있다. 삐쭉 빼쭉 엉망이지만.
문 열기 전에 가서, 기다리지 않고 하리라. 아니면 미용실에서 버리는 시간이 너무 많다. 일찍 나섰다. 내 차 ‘프린’은 공주처럼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공주를 부리는 나. 싱긋 웃으며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블랙아이스를 조심하며 속도를 줄여 운행했다. 산야의 응달진 곳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남아 희끗거렸다. 도착 예상 시간이 떴다. 미용실 열기 5분 전이다. 딱 좋다. 시간 야무지게 쓰겠다.
여자와 집과 글은 매만지기 나름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어디 여자뿐이랴. 남자도 그렇고 동식물까지도. 아니, 물건까지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엉망인 것들을 매만지고 매만져 놓으면 대부분 그럴듯해진다. 다 쓰러져 가는 폐가도 아주 고풍스럽고 멋진 개성적인 집으로 재탄생되지 않던가. 얼굴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부조화인 사람도, 의학의 힘을 빌려 조화로운 얼굴로 탄생되기도 하고. 중구난방 정신없던 글도 퇴고를 통해, 독자의 시선 강탈하는 작품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세상 모든 것이 매만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알면서 왜 나를 매만지지 않았을까. 옷은 때와 장소에 따라 입으면 되고, 미용실엔 꼭 필요할 때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외양 가꾸는 데 관심두지 않았다. 가족들에게는 그러지 않았는데, 오직 나에게만. 대책 없는 자신감이었다. 아니, 어려웠던 시절의 상처 때문일지도.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 위무했다. 내면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은 외양을 꾸미지 않는 법이야, 잘난 척하며.
펌을 하는데 두 시간 걸렸다. 십 년 더 젊어 보여요. 동생과 미용실 원장의 말이다. 십 년은 과장이겠지만 내가 봐도 달라 보이긴 한다. 원장은 멀리서 왔다고 머릿결 좋아지는 관리까지 해주었다. 특별한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지만 시간은 많이 소요되었다. 어쩔 수 없다.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이제 멋 좀 부려요. 동생의 말이다. 멋이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닐 텐데 싶지만 수긍이 갔다. ‘겉 볼 안’이라는 말도 있으니.
겉 볼 안, 겉을 보면 안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맞다. 겉을 꾸미면서 안도 생각하게 될 테니까. 마찬가지로 안이 아름다우면 그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가. 미술을 전공하거나 그쪽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대부분 외모가 남다르다. 어릴 적부터 조화롭게 생긴 본인의 얼굴을 보며,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고 미적 감각을 키웠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겉을 보면 안을 알 수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결국 겉과 안이 같다는 것 아닌가. 물론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도 있지만. 그만큼 사람은 다양하다는 의미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꾸 룸미러를 본다. 십 년까지는 몰라도 젊어진 것은 틀림없다. 얼굴의 주름도 감춰진 듯하고. 확실히 기분 좋다. 우울하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미용실에 가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이렇게 사람을 바꿔놓으니 말이다. 기분까지. 이제 미용실에 6개월 넘어가지 말고, 적어도 3개월에 한 번은 가리라. 커트도 손수 해서 쥐 파먹은 것처럼 하지 말고. 자르다 실수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머리는 길어지니까 하며 위안했는데.
펌 하나로 십 년이 젊어졌는데, 이제 겉 볼 안이라고 마음까지 젊어질 수 있을까. 아니 젊어져야 한다. 젊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는 의미도 된다. 마음이 젊으면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새로운 어떤 것이 유입되어도 거부하지 않는 게 젊은 감각이다. 나 때는 어땠는데 지금은 어떻다는 둥 배척하지 말고, 취사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 무조건 배척하는 것 모두 문제 있으니, 지금까지 쓰고 달고 고달픈 것을 겪어낸 연륜으로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이를 앞세워 지레 겁내지 말고.
나이를 잊지 말아야 하지만 너무 의식할 필요 없다. 누구 말처럼 내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니까. 지금까지 경험으로 볼 때, 무엇이든 십 년 성실히 하면 웬만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작을 하지 않아서 문제다. 또 윤 군처럼 구상만 하지 말고, 하루에 500자라도 쓰자. 벽돌 하나하나 쌓아 건물을 짓듯, 한 자 한 자 글을 써서 대작을 만들 수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펌 하기를 잘했다. 십 년 더 젊어 뵈는 것도 좋지만 이렇듯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었으니까.
셀카를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먼저 톡 안 하려던 거리두기 첫째 방안을 잊고. 전과 달리 즉각 답이 왔다. 오호, 펌하셨어요? 잘 어울리고 예쁘시네요. 십 년 젊어 보여요. 아들의 말이다. 역시 그림쟁이 우리 아들의 평은 구체적이고 미적이다. 괜찮네, 근데 여전히 얼굴은 커. 딸의 말이다. 나를 디스 하는 것이 취미인 딸이니까, 그냥 넘겼다. 마음도 너그러워졌다. 일단 펌은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