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지난 연말에, 미루고 미루던 건강검진을 했다. 5년 만이었다. 긴장되었다. 왜 건강검진은 시험 같고, 결과는 성적표 같은 걸까. 몇 년째, 연말이 돼서야 병원에 전화하면 예약이 끝나 있었다. 두 번이나 놓치고, 막차 떠나려고 할 때 간신히 발은 올려놓은 것처럼, 연말에야 했다. 바빠서 못한 것도 있지만 미루다 보니 그렇다. 아무튼 몇 년 동안 못한 것을 공단에 신청해 겨우 했다.
병원은 싫다. 누가 좋아하랴. 냄새가 싫고 분위기가 싫다. 검진을 주로 하는 곳은 좀 다르다. 건강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이므로. 간판도 ‘ㅇㅇ헬스케어’로 붙였다. 병원에는 사람들이 득시글댔다. 그 넓은 곳, 많은 의자에, 앉을자리가 없다. 모두 나처럼 연말까지 미루고 미룬 사람들이리라. 그만큼 바빴다는 의미겠지. 나와 그들을 한꺼번에 이해한다. 진행하는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일정이 모두 끝났다. 2시간 정도 소요된 듯하다. 결과는 2주 후에 나온다니 기다려볼 일이다.
그 2주가 되지 않았는데 결과지가 배달되었다. 가슴이 두근댔다. 예상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5년 전에 대장 내시경하면서 용종 다섯 개를 떼어냈었고, 상처가 나 만신창이가 된 위를 봤지 않았던가. 그것 때문에 소식 중이기도 하고. 아침마다 검사하는 공복혈당이 떨어지지 않는 지 몇 달이며, 몸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느끼기도 하는데. 결과지를 선뜻 열지 못해 망설였다. 두근두근 가슴이 요동친다. 학생들도 성적 열람할 때 이랬을까. 잘 줄 수 있는 한, 더 잘 줄 걸. 끝나버린 일에도 갑자기 아쉬움이 인다.
할 수 없다. 열어봐야 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생각했다. 만약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집안을 훑어보았다.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저것들을 먼저 다 버려야 한다. 삼십 년이 넘은 저 가구들. 그중에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이사할 때마다 끌고 다녔던 서랍장이다. 저 서랍장 사던 날 얼마나 고심했던가. 또 집안에 들여놓고 얼마나 함함했던가. 그래도 버려야 한다. 십여 년 전, 이 집으로 올 때도 버리라 말라 왈가왈부했던 가구 아닌가.
서재로 갔다. 우리 집에서 가장 큰방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 빼곡하게 들어찬 책이 나의 재산이라면 재산인데. 결혼할 때 혼수를 변변찮게 하면서, 책만 몇 박스 가지고 와, 시댁 어른 중 한 분이 발로 툭툭 찼던 기억도 났다. 책 한 권을 꺼내보았다. 세로 쓰기로 된 글자가 작고 한자가 섞여 있는 책. 가끔 줄을 그어놓고 짧게 메모한 감정의 비늘. 소중한 나의 그때 감정. 열여덟 살, 스무 살 그때의 나를 만난다. 그랬구나, 그랬었지. 이 책을 사고 설렜던 감정들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부엌 가구들도 돌아보았다. 별로 쓸 만한 것이 없다. 지금 버려도 아까운 것이 없다. 워낙 살림은 엉터리고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사지 않았으니까. 어느 집에 갔더니 세계 곳곳에서 사 온 접시들이 즐비해 놀란 적 있다. 여행할 때마다 사 온다니, 내게는 그런 취미가 없다. 여행지에서 물건 사는 걸 싫어한다. 그러니 딱히 추억이 서린 그릇이 없다. 있다면 시부모님 밥주발, 수저 그리고 시어머님이 쓰시던 양푼 하나다. 돌아가신 지 40년이 넘었는데 그것만은 간직하고 있다.
거실 소파에 앉았다. 결과지 봉투를 쳐다본다.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내 촉수가 유난히 예민해 예감이 잘 맞는데. 서류봉투 모양의 잿빛 비닐 속에 들어 있을 결과지. 누가 그랬다. 나쁘면 전화로 먼저 연락이 올 거라고. 검사할 때 이야기한 것이 없다면 이상 없는 거란다. 물론 이상 있다는 말을 들은 건 없다. 위염과 궤양으로 상처 난 위를 보여주며 소식하는 식습관을 가지라는 말밖에.
나쁘면 전화가 먼저 온다는 것도 맞지 않는다. 오래전에 위암이라고 적힌 결과지가 왔을 때, 전화가 오지 않았다. 딸이 오류일 수 있다고 병원에 먼저 확인하라고 달래지 않았다면, 나는 지레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병원에 확인한 결과 딸의 말처럼 오류였다.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의 것이 내게로 온 거였다. 내가 받은 충격에 대하여 대처하는 병원의 태도에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검진병원을 바꾸는 것밖에 없었다. 그 후 각종 의료사고에 불리한 환자의 입장을 깊이 이해했다.
일단 열어봐야 한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상상과 공상의 대가,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더 이상 상상과 공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대처하면 되리라.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잿빛 비닐봉투를 먼저 뜯었다. 흰색 파일이 하나 나왔다. 그 안에 결과가 적힌 유인물 여섯 장이 들어 있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훑어보았다. 예상했던 위염과 늙어가며 생기는 어느 부위의 석회화, 경계에 있는 혈당수치.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성적으로 본다면 B0, 80점에서 84점 사이. 이만큼 건강한 것은 3년 넘겨 매일 하고 있는 운동 덕분이다. 사실 크게 운동이랄 것도 없는 등산이나 산책이다. 아무리 바빠도, 눈이 오나 비가 와도, 빠뜨리지 않고 하는 게 걷기다. 또 하나 있다면 음식인데, 될 수 있으면 원재료를 요리하지 않고 그대로 먹는다.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 요리하기 번거로워서다.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몇 년 전 내 마음대로 살기로 작정하고부터 평안해졌다. 상당 부분. 물론 인간이기에 완전할 수는 없다.
두근두근하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내년 건강검진에서 더 좋은 성적표를 받아야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는 데까지 해보리라. 요즘, 사람들은 자기 몸에 투자하는 걸 우선으로 한다지 않던가. 사람에게, 물질에 투자해도 대가를 얻지 못할 경우 많은데, 자기 몸에 투자하는 것은 확실히 대가가 돌아온다고 해서. 타당성 있는 말이다. 노화로 인한 변화야 어쩔 수 없지만 섭생을 잘못해서 질병이 생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 아무튼, 이만하면 괜찮은 건강 성적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