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네잎클로버

남편

by 최명숙


시집을 뒤적이다 발견한 네잎클로버. 바짝 말라 부스러질 듯하다. 조금도 형태가 달라지지 않은 본모습 그대로 수분만 증발시키고 박제된 듯. 외로웠을까. 그래서 저리도 물기 하나 없이 말랐을까. 외로움을 속으로 삭이느라. 언제부터 책갈피에 끼워져 있었을까. 끼워놓고 전혀 생각조차 못했는데, 어느 날 불쑥 모습을 드러내다니. 나의 관심을 기다리다 지쳐, 나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어디서 가져온 네잎클로버였을까.


기억의 오솔길을 더듬고 더듬으며 가만가만 걸었다. 그래, 바로 거기 남한산성에서였다. 그와 함께 갔을 때. 그렇다면 적어도 십이 년은 되었으리라. 그 긴 세월, 한 번도 시집을 열지 않았다는 것인가. 읽은 시집이었으니 안 열어 본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와 남한산성에 갔던 날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세월이 이렇게 빠르다는 것이. 누구는 유수 같다 했고, 또 누구는 쏜 살 같다고 한 그 말이, 진부하지만 맞다.


그와 함께 침괘정에서 시작해 수어장대까지 올라가던 날이었다. 더위가 가시기 시작한 팔월 끝자락. 개강을 앞두고 산바람을 쐬고 싶었다. 담쟁이 잎사귀 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산으로 오르는 입구 눅눅한 곳에 고마리가 연분홍빛 머금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산괴불주머니와 물봉선도 노랗고 빨갛게 피어 온통 산자락을 수놓고. 그는 몇 번이고 물봉선 꽃 이름을 물었고, 나는 답해주었다. 자꾸 잊어버린다며 멋쩍게 웃는 모습이 천진무구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걷다가 다시 또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수어장대에 이르러 근처 벤치에 앉아 싸가지고 온 간식을 나누어 먹었고, 수어장대 앞마당에서 사진을 찍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디지털카메라로. 내 휴대전화는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딜 가든 디카를 들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것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다.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 파일을 열어 그날 찍은 사진을 불러냈다. 젊다. 그에게 살짝 기대 손을 잡고 있는 내 옆에서 그는 맑게 웃고 있다. 아픔을 잊고 걱정 하나 없는 사람처럼. 우리는 그때 힘든 삶의 골짜기를 건너고 있었는데. 그렇게 느끼지 않고 견뎌주는 그가 고마워 많이 웃던 때였다. 항상 구름 낀 하늘만 있는 것 아니듯, 삶도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희망을 놓지 않던 그때. 사진 속의 그날이 마치 어제인 듯 세세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서문 쪽으로 내려오다 클로버 잎이 무성한 곳을 발견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쪼그리고 앉아 네잎클로버를 찾기 시작했다. 수많은 클로버 잎 속에서 네잎클로버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잎을 하나하나 헤집다가 그가 먼저 발견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게 건네준 네잎클로버. 나도 하나 찾았고, 또 찾았고,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여섯 개를 찾았다.


보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레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려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네잎클로버는 모두 시들어 있었다. 물에 살짝 담갔다. 잎이 되살아나자 물기를 닦은 다음 시집에 끼워두었다. 잘 마르면 코팅해서 책갈피를 만들 생각이었다.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리라. 우리도 필요하니까 하나씩 갖고.


그렇게 절실했던 행운이었는데 잊고 있었다. 어쩌면 행운보다 행복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일까.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지만 세잎클로버는 행복이라고 하지 않던가. 흔한 세잎클로버처럼 가까이 있는 게 행복이란 걸 알았을까. 그래서 행운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우리에게 믿음이 있었던 것도 같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삶이 힘들수록 우리의 결속력은 더 강해졌으므로.


네잎클로버를 책갈피에서 꺼낼 수 없다. 손길이 닿으면 부스러질까 봐서다.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날 그와 함께 했던 추억도. 자꾸 꺼내 회상하면 마른 네잎클로버처럼 부서져 내릴까 봐서. 어떤 추억은 그대로 묻어두고 싶은 것도 있다.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이 그러하다. 소중해서 묻어두고 싶다. 하지만 가끔씩 꺼내 바람 쐬는 거풍 정도는 필요하다. 지금처럼 아주 가끔. 아니면 아예 퇴색해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을지 모르니까.


시집을 가만히 책꽂이에 꽂았다. 그의 손길이 닿아있는 네잎클로버도 함께. 그와 함께 했던 그날의 추억도 함께. 꽂아놓고 손으로 시집 모서리를 어루만졌다. 소중한 것은 간직하는 것이 맞다. 그리움도 함께. 삶은 그리움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운 것들은 하나씩 더 쌓여가고, 견뎌야 할 것들도 더 늘어난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견딤에 익숙해지는 게 연륜이니까. 세월과 함께 연륜도 깊어질 테니까.


그리움 끝에, 견딤 끝에, 해후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므로, 그리움을 견디는 것이리라. 네잎클로버가 책갈피 속에서 물기 하나 없이 말라가듯, 견디는 시간들이 수분 하나 없이 마르고 나면, 그 끝에 만남 또한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라도. 네잎클로버가 불러낸 사념들이 뇌리에 맴돈다. 그리움이 그와 나에게 행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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