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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앵두, 앵두

어머니와 온이

by 최명숙

가지가 찢어지게 달렸다는 앵두, 맞는 말이었다. 그 예쁘고 탱글탱글한 앵두가 가지가지마다 꽃처럼 달려 있었다. 그냥 두고 보는 게 나을 듯했다. 몇 번을 보더라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하도 예뻐서. 저 볼은 어쩜 저리도 빨갛게 물들었을까. 무엇이 부끄러워서. 아니다. 내면의 열정이 저렇게 표출된 것이리라. 산들, 바람이 불었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맞고, 햇살을 받으며 저렇게 익었을까.


“우와! 앵두다! 할머니 얼른 오세요. 앵두가 엄청 많아요. 저기도 앵두, 여기도 앵두.” 나보다 앞서 뛰어간 온이가 소리쳤다. 온이의 맑은 목소리가 뒤란에 울려 퍼졌다. 뒤따라오신 어머니는 뭘 그리 보고만 있느냐고, 소나기 퍼붓게 생겼으니 얼른 따라고, 성화하셨다. 소나기가 온들 무슨 상관이랴. 온이는 신나게 앵두를 딴다. 앵두 따기 체험, 체험 학습이 저절로 되고 있는 현장이다. 딸은 사진 찍느라 분주하다. 온아! 앵두 손에 들고 웃어봐, 온아! 증조할머니 옆에 서봐, 온아! 앵두 따봐. 이렇게 저렇게 표정을 짓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뒤뚱거리며 뒤란으로 오던 또온이가 엎어졌다. 울지도 않는다. 앵두만 보이나 보다. 손을 털고 일어나 앵두나무 앞으로 온다. 바닥에 닿을 듯한 가지에서 앵두를 하나 따서 먹는다. 딸의 얼굴에,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일찍 익어 떨어진 앵두 옆에 노란 씀바귀 꽃도 웃는다. 하늘도, 나도, 온이도, 또온이도, 모두 웃는다. 그러고 보니 앵두도 방긋방긋 웃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웃는 것 같다.


한 움큼 딴 앵두를 입에 넣었다. 가득하게 배어드는 새콤달콤한 맛. 그래, 이 맛이야! 옛날 그 옛날, 뒤란에 막냇동생을 앉혀놓고 따서 먹이다가 나도 맛보던 그 맛. 그때는 더디 익던 앵두였는데, 또 익는 족족 따서 먹는 바람에 늘 감질나던 앵두였는데, 이렇게 한 움큼 따서 입안에 가득 충족되게 먹어보다니. 오랜만인 듯했다. 해마다 앵두가 익어도 때맞춰 간 적이 없으니까. 세상살이가 뭐 그리 바빠 그랬을까. 맛으로 아닌 추억으로 먹는 앵두였다.


어머니는 기상통보관보다 정확하다. 한 대접 땄을까 말까 했는데, 추억에 젖고, 사진 찍느라 수선만 피웠는데,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던지기 시작했다. 딸은 또온이를 팔에 안고, 한 손으로는 온이 손을 잡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들어가시고. 나는 처마 아래 늘어진 가지에 달린 앵두를 땄다. 따다가 흘린 앵두가 나무 밑을 빨갛게 수놓고 있었다.


거실에 앉아 앵두를 먹는다. 마당에는 금세 물줄기가 도랑을 이룬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소나기. 화단의 플록스와 채송화, 꽃 진 금낭화와 모란 잎사귀, 마당 한쪽에 심은 몇 포기 상추, 고추, 가지. 모두 사정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맞고 있다. 온이들도 앵두를 먹으며 비를 본다. 또온이도 비를 안다. 비, 비! 손가락질하며 소리친다. 앵두를 먹고 난 후, 어머니와 나는 딸이 내온 양촌리 스타일의 커피를 마신다. 평화롭다.


잠시 내린 소나기가 그쳤다. 언제 그랬냐 싶게 파란 하늘, 내리쬐는 초여름 햇볕. 온이들은 다시 마당으로 나가 뛰어다니며 옷을 휘질렀다. 어머니는 전화를 하신다. 옆집과 앞집에. 잠시 후, 앞집 옆집 동생들이 소쿠리를 들고 왔다. “언니, 오셨어요?” 반갑게 인사하는 동생들도 벌써 환갑 나이가 되어 간단다. 기가 막힐 일이다. 사위를 보고 며느리를 보았다는 동생들. 내 기억에는 코흘리개 아이들, 교복 입은 모습들뿐인데.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동생들과 나는 뒤란에서 앵두를 딴다. 금세 소쿠리에 그득하게 담긴다. 소쿠리에 담긴 앵두처럼 우리들의 이야기도 많고 많다. 옆집 아주머니 등에 업혀 있을 때, 내가 까꿍 까꿍 하던 날이 있었다고 했더니, 둘은 넘어갈 듯 웃어댄다. 머리 잘라주고 숙제 봐주던 언니였다고 기억하는 그들. 그게 한 마을에 살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억이고 추억일 것이다. 그 기억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멀리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인생이리라.


어머니는 한쪽에 앉아 훈수를 두셨다. 저기 아직도 많다, 저 가지를 앞으로 잡아당겨서 따라, 에구 저 아까운 앵두 다 쏟아진다. 그럴 때마다 동생들이 와르르 웃고 나는 참견하실 수 있는 근력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소쿠리에 가득 찼다. 옆집 동생은 잼을 만들면 좋다고 했고, 앞집 동생은 술을 담그는 게 좋겠다고 했다. 모두 소쿠리보다 더 입이 벌어졌다.


어머니 드실 것 남기고, 딸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모두 내가 가지고 왔다. 잼을 만들고, 그냥도 먹고, 술도 담가야겠다. 우리 집은 지금 앵두 풍년이다. 온이들, 이웃집 동생들과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서 즐거운 날이었다. 무엇보다 어머니 걱정을 덜어드려서 다행이다. “속 시원하다, 아까운 저 앵두 어쩌나 했는데.” 떠날 때 하신 어머니 말씀이 지금도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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