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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l 20. 2023

롤링페이퍼

그때 그 학우

  

지금 생각하면 그때도 참 젊었다. 갓 마흔 살이었으니까. 스무 살짜리 학우들과 꼭 스무 살 차이가 났다. 그래서였을까. 나나 학우들이나 모두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별명이 ‘왕언니’ 또는 ‘왕누나’였으니까. 지칭은 그랬어도 그냥 언니 누나로 부르긴 했다.


집안 정리를 하는데 대학 첫 엠티 갔을 때 쓴 롤링페이퍼가 나왔다. 사반세기가 넘었다. 그래도 여전하다. 놀라웠다. 읽어보았다. 그날 엠티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큰 방에 빙 둘러앉아서 썼던 거다. 하룻밤을 함께 보낸 학우들. 대학생다운 생활을 처음으로 누려보았다. 예전에 다닌 대학에서는 엠티를 가본 적 없었으니까. 그때 학우들과 함께 게임하고 족구도 했다. 삼삼오오 모여 요리대회를 했고, 장기자랑도 했다. 그때 나는 노래를 불렀다.


王 누나 너무 좋아요!, 졸업할 때까지 지금의 젊음을 잃지 마세요, 누님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사랑하시오, 난 언니가 너무 좋아 따뜻하거든 앞으로 우리와 더 가까웠으면 해요, 언니의 푸근한 웃음이 좋아요, 나도 언니 나이만큼 되면 딱 언니처럼 웃고 싶네요, 우리 왕언니 든든해요, 왕언니 정말 좋아요 앞으로 잘 지내요 어려운 일 저한테 말하시고요, 명숙언니! 항상 순수한 마음 간직하세요, ……. 롤링페이퍼에 쓰인 짧은 문장에 학우들이 보내는 응원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중 더욱 눈길을 끄는 문장. 누나 다음엔 꼭 누나를 화려한 밤의 여왕으로 만들겠어요, 춤 선생. ‘건’이다. 엠티 가던 날 밤, 학우들은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때 음악은 9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의 노래였다. 생경했다. 당시 나는 좋아하던 가곡조차 부르지 않을 정도로 경직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90년대 중반을 풍미한 대중가요를 잘 알지 못했다. 학우들은 밤새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 내게 춤을 가르쳐주겠다며 이끌던 학우, 건. 얌전한 모습과 달리 춤 솜씨는 대단했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나를 화려한 밤의 여왕으로 만들진 못했다. 바람과 달리. 춤 선생의 자질이 부족했던 건 아니다. 내가 즐기지 못했다. 노는 문화에 익숙하지 못했기에. 그래도 엠티와 오티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그것도 수업의 연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후에 내가 선생이 되어 보니, 학생들은 의외로 오티나 엠티에 참여하지 않는 걸 알았다. 건은 졸업할 때까지 내게 친절한 학우였다.


학우들에게서 소외되지 않고 싶었다. 재밌게 학교생활을 하고도 싶었다. 그 방법이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엠티와 오티는 물론 체육대회, 개강과 종강파티, 스승의 날 행사, 문학의 밤, 연극 등. 방과 후 모임도 잦았다. 우리 과의 아지트가 학교 옆 주점이었다. 반지하에 있는 그 주점 주인은 우리 과 학생들을 거의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음식은 값이 쌌고 푸짐했으며 외상도 되는 곳. 어둑한 그 주점에는 언제나 우리 과 선후배와 동기들이 앉아 술과 음식을 먹으며 수다와 문학이야기를 했다.


나는 언제나 중간에 일어났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주부였고, 유아교육기관의 장이기도 했으니까. 새벽엔 새벽기도 빠지지 않는 신앙인으로, 아침엔 가족들의 식사와 살림을 책임지는 주부로, 낮에는 어린이집 원장으로, 저녁엔 대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녔다. 다른 학우들처럼 주점 문을 닫을 때까지 있을 수 없었다. 다음날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그래도 행복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일을 했으니까. 또 가족들 모두 건강했으니까.


롤링페이퍼는 나를 마흔 살 때로 끌고 들어갔다. 밤새 리포트 쓰고 공부하는 내게 남편은 묵묵히 지켜보다 한마디 하곤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원망이 하늘을 찔렀을 텐데,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것이니.”라고. 그렇다. 본인이 원해서 하는 거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른다. 그 힘듦이 행복이고 만족이기도 하다. 공부하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던 남편도 내 모습을 보고 차츰 변했던 것 같다. 협조하는 쪽으로.


모든 학우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몇몇은 연락하며 지내지만 한창 바쁠 시기라 만나기 쉽지 않다. 지금 마흔 중반을 살고 있을 그들. 안 봐도 짐작이 간다. 결혼해 아이 키우고 직장 다니는 중에, 가끔 문학에 열정을 가졌던 그때를 떠올릴까. 전공을 따라 살아가는 학우들은 많지 않다. 방송국이나 출판사에 있는 학우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공과 다른 일을 하며 사는 것 같다. 나의 춤 선생, 건이 궁금하다. 수소문했는데 아무도 소식을 모른단다.


롤링페이퍼, 다시 또 접어 소중히 보관했다. 언젠가 학우들을 만나게 될 때, 이 롤링페이퍼를 갖고 가리라. 각자 쓴 것들을 보며 웃을 수 있게. 무엇보다 그때 가졌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깨우게 된다면 더욱 의미 있으리라. 집 정리하면서 발견한 소중한 물품 중의 하나가 이 롤링페이퍼다. 이뿐 아니다. 학생들이 써준 것 세 개도 발견되었다. 함께 넣어두었다. 그날들이 그리우면 슬며시 꺼내보리라. 그때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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