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선물을 보냈다. 어버이날이라고. 먼저 전화로 화장품을 보냈다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하지 말라고 말할 뻔했다. 입에서 툭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누구에게든 심지어 자식에게도 받는 게 익숙하지 않다. 받으면 사실 마음이 불편하다. 이름 있는 날이니 딸은 챙기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 말라고 하려던 것을 꾹 참고, 고맙다 잘 쓸게,라고 했다. 이만큼만 해도 나는 꽤 세련되어 가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좀 촌스럽다. 딸이 화장품을 보낸 것은 나의 그 촌스러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용돈으로 주면 분명히 그 비싼 것으로 사지 않을 테니까. 언젠가부터 딸이 내가 쓰는 기초화장품을 챙긴다. 처음엔 질색했다. 이 비싼 것을 왜 샀느냐고. 딸은 엄마가 이것도 못 쓸 형편이냐며 눈을 하얗게 흘겼다. 그냥 주는 것이라도 쓰라면서. 내가 사용하는 것은 최소한의 것으로 하는 걸 딸은 못마땅해한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의 생활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는 촌스럽지 뭔가.
홈쇼핑에서 많이 주는 화장품을 즐겨 썼다. 그걸 아는 딸이 안 되겠는지 무슨 날만 되면 화장품을 선물한다. 그것도 아주 고가를. 고가라고 꼭 좋은 것 아니니 그러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사 쓴다고 만류했지만 딸은 듣지 않는다. 고집이 쇠심줄이다.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강 씨 집안사람을 닮은 것 같다. 고집 세기로는 안, 강, 최 순서라니 나는 강 씨 다음이다. 아, 이 이야기하려던 게 아니고, 아무튼 딸은 고집이 세다.
딸은 내게 옷도 좋은 것으로 사 입으라고 난리다. 몸을 가리면 되지 좋은 옷이 무슨 상관있느냐고 하면, 또 눈을 하얗게 흘긴다. 딸은 내게 눈을 흘기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눈을 흘겨대니 말이다. 옷이 장롱 안에 저리 많은데, 호흡이 멎는 날까지 안 사 입어도 된다고 하면 더 눈을 흘긴다. 더구나 딸이 시집가기 전에 입었던 헐렁한 옷들도 꽤 있다. 그 옷을 입으면 젊은이 감각도 있는 듯해 즐겨 입는다. 딸은 다 버리고 품위에 맞는 옷을 사 입으란다.
딸이 또 잔소리하는 게 있다. 음식이다. 질 좋은 식사를 해야 건강하다며 맛있는 것 좋은 것 사 먹든지 해 먹으라고 한다. 딸네 가면 좋은 음식을 해주거나 사주는 게 그 이유다. 살이 지금도 이렇게 피둥피둥 쪘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면, 딸은 제대로 안 먹어서 살이 안 빠지는 것이라며 이상한 논리를 편다. 어찌나 논리 정연하게 설명을 하는지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잘 안 먹어서 살찐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딸이 내게 하는 부탁의 말은 세 가지다. 화장품 좋은 것 쓰기, 옷 사 입기, 좋은 음식 먹기. 다른 부분에 대한 것은 노코멘트다. 일절 말하지 않는다. 엄마는 왜 그렇게 자신에게 인색하냐고, 우리 그만 챙기고 엄마 위해 쓰란다. 솔직히 별로 아이들을 위해 쓰는 것도 없다. 나를 위해 딸이 하는 말인 줄 안다. 나 스스로에게 인색하다는 말도 맞다. 어려웠던 시절에 그것 말고 줄일 게 없어서 그랬던 것이 습관처럼 돼 버린 것 같다. 그렇다고 못 쓰고 못 먹는 것도 아닌데.
딸이 보낸 선물 포장을 풀었다. 늘 사주는 브랜드의 화장품이다. 이번에는 종류가 더 많다. 팩까지 들어 있다. 팩을 언제 해봤던가. 딸 결혼하기 전날 했던가. 아무튼 늘어가는 주름살 한탄할 게 못된다. 이렇게 관리를 하지 않는 나다. 이제 팩도 열심히 하고, 화장품도 잘 발라야겠다. 솔직히 고가이기 때문에 아껴 바르곤 한다. 이만큼 바르면 얼마인가 싶어 좁쌀만큼 바를 때도 있으니까. 그것 보면 촌스럽긴 하다. 그런 걸 알고 더 많이 보낸 게 아닌가 싶다.
전화를 했다. 참 많이도 보냈네, 하며. 사부인께도 선물 보내드렸느냐고 물었더니, 한마디로 정리한다. 당근. 나와 똑같은 것으로 해드렸단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고맙다, 잘 쓸게. 팍팍.” 딸이 수화기 너머에서 웃는다.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알리라.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 말만 하고 끊었다. 자식들이 선물이나 용돈을 줄 때 만류하지 않고 받는 게 좋단다. 나도 요즘엔 연습 중이다. 고맙다는 말만 하고 다른 말 안 하기로. 화장품은 비싸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야,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는다.
요즘 익숙해지고 있다, 딸의 잔소리에. 그러면 나이 드는 것인데. 여동생이 엊그제 말했다. 엄마한테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된다고. 그건 염려되어서 하는 것인데 뭘 마음에 걸려 하느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머니와 통화하게 되면 이런저런 부탁만 하게 된다. 딸도 언젠가부터 내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염려되어서 그러리라. 예전에 자식을 키울 때는 내가 그랬는데 이제 주객이 전도되었다. 따지고 싶지 않다. 받아들여야지.
딸의 잔소리에 익숙해지는 건 눈 흘기는 게 무서워서 아니다. 그게 편하다. 또 그게 맞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판단력이 아직 흐려진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이제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딸의 잔소리에 익숙해지련다. 자기 어미한테 해가 되게 하랴 싶다. 아무튼 올해 어버이날 선물은 고가의 화장품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