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쓴다
컴퓨터를 부팅한다. 올해로 산 지 5년 차, 이만하면 속도가 괜찮다. 처음보다 느려지긴 했어도. 한컴 로그를 클릭한다. 하얀 화면이 뜬다. 커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껌벅거린다. 한 문장 쓰고 나면 또 껌벅껌벅. 무언의 재촉이다. 세상천지에 재촉한다고 해도 나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 문장이 떠오르지 않으면 커서에 대고 중얼댄다. 내 맘이야,라고. 그래도 커서는 들은 척 만 척 일정한 간격으로 껌벅거린다. 성실한 일꾼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아랑곳 않고 자기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오늘 할 일은 글 한 편 쓰는 거다. 그 과제를 하지 못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어김없는 글 감옥에 갇힌 셈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먹구름이 걷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몰려 있어, 비가 올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고민하는 사이 걷혔다. 뭉게구름이 하얗게 피어난다. 이럴 때 산에 가면 더없이 좋을 텐데. 저 커서가 나를 지켜보며 문장을 찍으라고 재촉하고 있으니, 내치고 갈 수 없다.
두 단락을 썼다. 주제 선정을 하지 않고 글을 쓴다는 건 무모하다. 할 일을 하고 쉬자, 커서는 성실하다, 재촉해도 나는 느긋하게 내 길을 간다, 어느 것을 주제로 할까. 정하지 못해 허둥대고 있는데 커서는 여전히 자기 일만 한다. 껌벅껌벅. 얄밉다. 내가 알아서 문자를 찍도록 기다려주지 않는 커서. 기계니까. 그래도 너무하다. 어휘 하나를 찍는 중에도 잠시만 쉬면 어김없이 껌벅거리니. 꼭 재촉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컴퓨터 기술자라면 커서가 껌벅거리지 않도록 만들리라. 등을 떠미는 것 같은 저 껌벅거리는 행위, 멈추게 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그렇게 떠밀리듯 살아왔기 때문일까. 강박감이다, 이건. 잠시만 타이핑을 멈추면 더 강한 재촉으로 다가오는 커서의 껌벅거림. 아, 조급해진다. 문장이 더 떠오르지 않는다. 컴퓨터 기술자가 되지 못한 걸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저 커서와 같았다. 잠시의 휴식도 못 견뎌했던 나. 쉬면 그 시간이 아까웠고, 무료했다. 일중독이었다. 그것이 내게만 해당되지 않았다. 온 가족들에게 적용했다. 나 외에 모두 느긋하기 한량없던 가족들 때문에 내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저 커서를 보니, 가족들이 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깨닫는다. 재촉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별반 없다는 걸. 커서가 선생이구나, 내게는.
세상에 선생 아닌 게 어디 있던가. 더위를 참고 땡볕을 받고 있는 들풀에게서 인내심을 배운다.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에게서 자유로움을 배운다. 자연물도 이럴진대 사람에게야 오죽하랴. 공자님도 일찍부터 그랬다. 세상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고. 자연이 선생이고, 사람이 선생이고, 커서도 선생이다. 그것으로 인해 깨우치면 모두 선생인 셈이다. 평생 선생노릇이랍시고 해온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학생들은 내게서 배울 게 있었을까.
아, 이렇게 헛소리든 뭐든 쓰다 보니 여섯 단락을 썼다. 주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주제는 처음에 설정하고 쓰는 경우가 있지만 이렇게 쓰다가 명확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다 쓰고 나서야, 주제가 정해진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주제 설정에 얽매일 필요 없다. 물론 주제를 정하고 글을 쓰는 게 바람직하지만. 안 될 때는 그냥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 주제는 제목에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제목 짓기에 심혈을 기울이기 마련. 제목이 일명 낚시 글이 되면 안 된다. 하지만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글의 내용을 내포하는 상징적 제목이라면 좋으리라. 이번 단락을 쓰면서 제목도 정해지고 있다. 아직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제목을 지어놓고 몇 번씩 바꾸기도 한다. 심지어 수십 번 바꾼 것도 있을 정도로 제목 짓기는 글쓰기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커서의 재촉을 외면하지 못하고 억지로라도 이렇게 글을 한 편 짓는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하기 싫은 것을 참고 해내는 것도 의미 있다고 본다. 그게 삶이니까. 그렇게 하면서 삶의 지난한 모습을 엿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니까. 되든지 말든지 내키는 대로 사는 건 아무래도 질서가 없지 않은가. 이러니 커서가 내게는 선생이 아닌가.
주제가 명확해졌다. ‘세상 모든 게 선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놓쳤다면 아무런 잘못 없는 커서의 껌벅거림을 어떻게 없앨까 궁리하고, 예민하기 그지없는 내 성격을 원망하고, 나는 왜 컴퓨터 기술자가 못됐을까 후회하고, 그러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스스로 그 현실을 견디지 못해 스트레스받았을 거다. 또 이런 주제로 글을 쓰며 나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보인 것이 마뜩하지 않아, 글을 그대로 둘까 내릴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커서의 껌벅거림, 그것을 통해 이렇게 깨닫게 되는 나, 괜찮지 않은가. 자존감이 되살아난다. 그동안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비가 올 모양이다. 산에 못 가면 우산 쓰고 개울가 산책로를 걸어야겠다. 껌벅거리는 커서를 재촉으로 생각하지 않고 응원으로 여기면서. 힘내서 문자를 찍고 생각과 마음을 기록하라는.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일까. 다시 보니 커서의 껌벅거림이 응원으로 보인다. 아, 제목을 이렇게 바꿀까. 다시 또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