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육아

by 최명숙

고생총량의 법칙.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본 지인이 그랬다. 내게 고생총량의 법칙을 적용해 본다면, 앞으로 고생은 없을 거라고. 그 지인의 말을 철썩 같이 믿은 건 아니나, 듣기 나쁘지 않았다. “정말 그럴까요? 그럼 난 이제 고생할 일이 없는 걸까요?”라고 물었다. 지인은 한마디로 일갈했다. 물론이라고. 삼 년쯤 전이었다. 그 지인이 말했다. 모든 것에 총량의 법칙이 있다더라고. 그녀도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이리라.


사람들은 말을 지혜롭게 잘 만들어낸다. 그 말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될 때 신뢰하게 되기도 한다. 사람이 힘든 현실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렇게 탄생된 숱한 속담이나 격언 등이 있지 않은가. 상당 부분 철학적이고, 진리처럼 생각되는 말도 있다. 그래서 더 신뢰가 가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저런 총량의 법칙들도 그렇게 만들어졌고, 또 그것을 타당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일지도.


고생총량의 법칙은 그렇다 치자. 어느 평론가가 흥행했던 영화 평론을 쓰면서 사용했던 ‘지랄총량’의 법칙은 또 어떤가. 입에 담기 불편한 단어 지랄, 그건 또 어떤가 말이다. 사전에 ‘지랄’은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기록돼 있다. 어떤 이는 중2병이라고 하는 것을 예로 들어 그 ‘지랄’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다지 입에 담기 불편한 단어도 아닌 셈이다.


사실, 내가 자란 고향에서 이 단어는 의미에 비해 가볍고 대수롭지 않은 뜻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냥 봐준다는 느낌으로, 때론 우스개로. 억지를 쓰며 분별없이 나대는 행동을 할 때 주로 썼다. 누가 정신 사납게 하거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 “지랄두 참!” 하면서 넘어가 주곤 했다. 그것도 빙긋 웃으며.


고생총량의 법칙이 있고 지랄총량의 법칙도 있다면 행복총량의 법칙도 있지 않을까. 있을 것 같다. 그전에 나는 요즘 ‘육아 총량의 법칙’을 채우고 있는 중인 듯하다. 아들이 집으로 들어온 이후, 아들 돌보기(?)에 시간을 많이 쓰고 있으니까. 아침 여섯 시 전에 일어나 식사준비하고, 도시락을 두 개 싼다. 간식과 건강식품까지 꼼꼼하게 챙긴다. 틈틈이 아들 방 청소와 아들 옷 빨래까지. 단출하게 살 때보다 훨씬 분주하다. 이런 나에게 딸이 말했다. “엄마, 오빠 돌보는 것, 모자랐던 육아총량 채운다고 생각해.”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잊어서 그럴까. 실제로 그랬을까. 아들은 유난히 순하게 컸다. 말썽을 부린 적 없고, 말을 안 들은 적도 없다. 순종적이었다. 거기다 학원 한 번 다닌 적 없는데, 공부까지 잘했다. 줄곧 최상위권을 유지했으니까. 친척 집에 데리고 가도 동화책 한 권 있으면 조용히 앉아 책만 보다 오는 아이였다. 주위 사람들이 이런 애라면 열도 키우겠다고 할 정도로 거저 키웠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딸에게 한 적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한 말인가. 모자랐던 육아 총량 채운다고 생각하라는 말이.


아들은 말썽 한 번 제대로 부리지 않고 자라더니,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아니 그림을 하면서부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수시로 했다. 그림 시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왜 그림을 시켰던가. 꼭 그림이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만 같았다. 내 잣대로 꾸중하고 훈육하기를 서른 살까지 했다. 개선되지 않고 관계만 나빠졌다. 아들은 결국 독립을 선언하고 나가 살았다. 십 년이 넘도록. 아들은 그 지랄총량의 시간을 다 채우고 돌아온 것일까.


아들이 집으로 들어온다고 할 때,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관계가 더 나빠질 것 같아서.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부딪쳤으니까. 이해하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간극이 좁혀지지 않아, 아들과 합가를 놓고 전문가에게 상담받을 생각까지 했다. 막상 함께 살게 되니 그럴 일이 없었다. 기이한 일이다. 감성적인 면이 닿아있는 두 사람이라 그럴까, 어미와 아들 관계여서 그럴까. 아들에게 그 지랄총량이 다 채워져서 그럴까. 모르겠다. 의외로 갈등이 거의 없다. 그게 신기할 뿐이다.


아니면 무의식 중에 내가 인식하고 있는 걸까. 육아총량의 법칙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그도 저도 잘 모르겠다. 신기하기만 하다. 아들과 함께 사는 게 불편하지 않고, 힘들지 않다는 게.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 수발하는 게 어렵지 않다. 아들은 고마워하고 미안해하지만. 딸의 말을 떠올리면 더 당연하게 생각된다. 손 가지 않게 자랐고 순종적이었던 그 아들에게, 육아총량을 채워보리라. 마흔두 살 성인에게 육아라니. 우습다면 우습지만 사람마다 상황이 다른 거니까.


뜬금없는 생각이 든다. 육아총량의 법칙을 수행하고 나면 ‘행복총량’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모든 것에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행복이라고 없으랴. 분명히 내게도 행복총량의 법칙이 적용될 날이 오리라. 그걸 굳건히 믿으며 누가 뭐래도 오늘은 육아총량의 법칙을 묵묵히 수행하리라. 이 나이에 육아라니, 그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총량의 법칙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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