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아저씨

by 최명숙


옆집 아저씨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간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용기를 내서 불렀다. 아저씨가 돌아봤다.

“돈 좀 빌려주세요.”

다짜고짜 옆집 아이가 돈을 빌려달라니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하다. 예상치 못한 표정이 아니었다.

“얼마나?”

아저씨는 양복 안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물었다.

“5,000원이요.”

아저씨는 더 이상 묻지 않고 5,000원을 건네주었다. 물론 표정에는 궁금함을 잔뜩 머금고. 하지만 빙긋 한 번 웃고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당시에 그 돈은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내가 공장에 다녀 받은 월급이 13,000원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아저씨는 선뜻 빌려줬던 거다. 빌린 5,000원으로 나는 고등학교 과정 강의록을 주문했고, 보름쯤 후 내게 배달되었다.


중학교 졸업 후, 나는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래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마산에 있는 공장에 다니다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넘었다. 무료했고, 암담했으며, 답답했다. 강의록으로 공부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싶었다. 다니던 공장에서 나올 퇴직금과 한 달분 월급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받으면 빌린 5,000원을 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월급을 대신 받아 보내주기로 한 동료는 회사 사정을 핑계로 보내주지 않았다. 두 달이 흐른 후에, 도장까지 맡기고 온 나의 불찰을 후회했다. 그 돈을 갚을 방법이 없었다.


공부도 잘되지 않았다. 강의록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고, 종이 질과 활자가 좋지 않아 눈이 아팠다. 무엇보다 한 달 후에 갚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어기게 되어 아저씨 보기가 영 불편했다. 저쪽에서 옆집 아저씨가 보이면 피했다. 볼 면목이 없었다. 그때까지 약속을 꼭 지키는 게 철칙이나 다름없게 생각하던 나였다. 심지어, 첫눈 오는 날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는 뜬구름 같은 약속을, 철썩 같이 믿고 나갔던 나다. 그러니 약속 못 지키는 내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얼마 후 객지로 다시 나가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월급 보내면 옆집 아저씨에게 빌린 돈을 꼭 먼저 갚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서울로 가며 죄책감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에게 다시 또 다짐을 받고 버스에 올랐다.


옆집 아저씨는 아버지의 친구다. 나를 보면 빙긋 웃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버지 없이 어렵게 크는 친구의 딸이 남달리 보였으리라. 공부 열심히 해라, 동생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할머니 엄마 말씀 잘 들어라. 가끔 그런 말도 했지만 거의 머리만 쓰다듬는 정도였다. 매일 저녁 우리 집에 마실 와서 내가 공부하는 걸 보았다. 별 것 아닌 것에도 칭찬을 하면서. 줄을 참 반듯하게 긋는구나, 글씨를 아주 큼직하게 잘 쓴다, 등등.


어머니는 약속대로 내가 보낸 월급으로 그 돈을 갚았다. 아저씨는 뭘 그걸 주느냐고 그만두라고 했다는데, 내 부탁이라며 갚았다는 후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맹랑한 일이다. 그 큰돈을 대뜸 빌려달라고 했으니. 아저씨는 두고 보라고, 아주 제대로 될 아이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단다. 아직은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니지만 노력한다. 그건 나를 믿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산 강의록은 내가 객지에서 삶의 터전을 옮길 때마다 함께 다녔다. 꼼꼼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불쑥불쑥 꺼내보았고, 향학열이 꺼지지 않도록 불씨 역할을 톡톡히 했다. 2년 후 그렇게 열망하던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니까. 그래도 강의록을 버리지 않고 짬짬이 열어보았다. 막상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자습서 역할도 제법 했기 때문이다. 그때 읽었던 민태원 선생의 <청춘 예찬>은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글이다. 그 후로도 강의록은 오랜 기간 동안 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가끔 너무 지쳐 힘들 때, 공부가 버거울 때, 그 책이 손에 들어왔던 기쁜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옆집 아저씨에게 돈 빌려달라는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며칠 동안 고민했다. 읍내 나가는 아저씨를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불러 세웠는지 모른다. 돈을 빌릴 사람이 아저씨밖에 우리 마을에는 없었다. 그때 아저씨는 읍내와 청주를 거점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에 늘 마실 왔기에 다른 어떤 어른보다 친근감이 있었다. 집을 떠나며 돈 빌린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아저씨의 행동을 이해 못 한 듯했다. 어린 널 뭘 믿고 그 큰돈을 빌려 주시더냐, 참나.


그 아저씨의 마음을 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더 고맙다. 그런데 그 말을 못 했다. 고향에 갔을 때,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드리는 게 다였다. 그때 감사했다고 말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왜 못했을까. 하지만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 한 자락은 내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그 따뜻한 마음에 대한 보답이라면 보답이리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저씨의 부음을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고향을 찾았다. 문상하고 영정사진을 오래 보았다. 뜬금없다는 표정이긴 하지만 선뜻 양복 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시던 모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저씨는 여전히 빙긋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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