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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Dec 26. 2023

글쓰기는 내게

    

나는 감정기복이 심하다. 예민한 감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사람보다 변덕이 심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내가 변덕스럽지 않은 성격이라는 건 자타인정. 아무도 나를 변덕스럽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한 번 정한 건 내게 손해가 된다 해도 그대로 하는 편이므로. 어릴 적부터 몸에 굳어진 습관이다. 감정기복이 심해도 내면에서만 일어날 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마음수양이 되어서 그럴까. 아니다. 누구보다 그 부분에 의미를 두고 노력하지만 잘 안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언제 사람이 제대로 될까 고민한다. 행동 하나하나를 성찰하고 자의식을 가질 때 자주 있다. 항상 덜 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울 때도 많다. 거의 평생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 말이다. 마음수양은 호흡이 있는 날까지 해도 모자라고 모자랄 것만 같다. 


유난히 예민한 감성을 가진 내가 어렸을 적부터 들었던 말은 까다롭다는 말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나의 어릴 적 이야기만 나오면,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하신다. 그래서 남의 손이 가게 하는 적은 없었다며. 맡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을 잘했고,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혼자서도 종일 잘 지냈다고. 신나게 노는 일보다, 조용히 책을 보거나 뭔가 생각하고 쓰기를 좋아했다고. 까다로운 성격은 예민함에서 오는 거라고 본다. 내 성장환경은 그 예민함을 극대화시켰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동화책이 없던 시절, 옆집 오빠들의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읽었고, 알지 못했던 세계를 교과서로 탐험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일기를 꼬박꼬박 썼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쓴 일기장은 아직도 내 보물 상자 속에 들어 있다. 마흔 살 나이로 문학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썼던 일기장. 마흔 살부터 본격적으로 습작하면서 일기는 간헐적으로 쓰게 되었다. 수필과 시 소설 등의 문학작품을 닥치는 대로 써보면서 예민한 내 감성을 달랬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내가 감정기복이 심한 데도 변덕스럽지 않은 건 모두 글쓰기 덕분이다. 내가 인격적으로 마음수양이 잘 돼서 그런 것도 아니고, 누가 잘 가르쳐서 이만큼 된 것도 아닌 것 같다. 오로지 글쓰기 덕분이다. 글을 쓰면서 예민한 감성을 표현하고 달래고 다독였다. 심한 감정기복을 다스리는 데에도 글쓰기가 요긴하게 쓰였다. 글을 쓰면서 감정이 정화되었기 때문이리라. 환경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우울감이 심했다. 그 우울감도 글을 쓰면서 해소되었다. 마음이 불안하거나 우울해지면 일기를 쓰든 낙서를 하든 무슨 글이든 썼다. 


글쓰기는 내게 어떤 의미일까. 위에 이야기한 것을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글쓰기는 나의 마음을 구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작가들도 글쓰기는 마음을 구원한다,라고 말한다. 종교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듯 글쓰기는 사람의 마음을 구원한다고. 아주 설득력 있는 말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마음이 피폐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마음을 구원한 게 맞지 뭔가. 


또 글쓰기는 내게 어떤 것일까. 벗이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 알아주는. 이런 글이든 저런 글이든 글로 투정하면 다 받아준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써도 다 받아준다. 세상천지에 이런 친구가 있을까. 없다. 친구도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데,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일방적으로 써대도 된다. 한 번도 화내거나 싫은 내색하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니 글쓰기는 벗이지 않나. 지음과 같은 벗. 


또 글쓰기는 내게 노후대책이다. 요즘 노후대책이라면, 물질을 먼저 떠올린다. 노후에 수입이 없을 때 쓸 자금, 그것을 노후대책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나는 그보다 더 노후대책이 되는 게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함께 할 사람이 없어도 컴퓨터 자판을 칠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는 게 글쓰기다. 물질이 필요하지 않으니 경제적이고, 마음의 건강을 지킬 수 있으니 금상첨화 아닌가. 또 심심하지 않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글쓰기만 한 노후대책이 또 있을까. 


나는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이었고, 예민한 감성을 타고나 까다로운 성격을 가졌으며, 성장환경이 좋지 않아 우울감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것을 다스리며 지금까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건 글쓰기 덕분이다. 어릴 적엔 일기를 썼고, 자라면서 글쓰기를 벗으로 여겼고, 지금은 노후대책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글쓰기 덕분이다. 타고난 성격도 바꾸는 글쓰기, 이 글쓰기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글쓰기는 위에 열거한 것 외에 어릴 적부터 내 꿈이었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글쓰기가 재밌었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감이 없고, 쓰는 게 좋아 쓰다 보니, 그것으로 인한 어려움이 없었다. 흔히 창작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한다.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다. 하지만 즐기면서 하다 보면 그런 고통은 없다. 글을 잘 쓰고 못 쓰는 것은 재능과 관련된 것도 있겠지만 성실히 쓰다 보면 좋은 글을 쓰는 날도 오리라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글쓰기는 내게 마음을 구원하는 방법이고, 지음 같은 벗이며, 노후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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