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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Dec 28. 2023

착각엔 커트라인이 없다


착각엔 커트라인이 없다고 한다. 맞다. 그걸 누가 정하겠는가. 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착각이리라. 착각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상황과 형태는 다르겠으나 모두 이런저런 착각을 하면서 산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착각하며 사는 것만 같다. 가끔 그게 인지될 때 있으니까. 


나는 나를 젊다고 착각했다. 얼마 전 모임에서다. 모임장소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 명 모여 앉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환히 웃으며. 이상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데. 늙수레 하고 머리가 벗어진 할아버지와 주름 자글자글한 아주머니들이었다. 뚤레뚤레 주위를 살폈다. 내 친구들이 어디 있나 싶어서. “최박 여기야! 여기!”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늙수레한 남자가 내게 손짓했다. 그제야 보였다. 남자동창생 ‘석’이었다. 저 남자들과 여성들을 나보다 훨씬 나이 든 사람들이라 착각했고, 내 친구일 리 없다고 착각하다니 나도 참. 


자리에 앉자 그렇게 손을 흔들어도 안 보이더냐고, 눈이 나빠서 어쩌느냐고, 친구 '순'이 걱정했다. 차마, 너희들인 줄 몰랐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그 친구는 앉자마자 어머! 살이 붙었구나, 나이 들어 살찌면 병만 생겨! 하면서 내 걱정을 했다. 에고 무슨 걱정. 내가 볼 때 그 친구도 만만치 않은데, 착각하고 있지 뭔가. 입 닫았다. 그녀는 눈가에 주름이 더 많아졌다며, 화장품을 자기가 쓰고 있는 것으로 바꿔보라고 말했다. 아, 이거야말로 오지랖. 


친구의 끊임없는 착각 때문에 나중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 친구가 내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친구에게도 계속 오지랖을. 듣다 못한 ‘석’이 그 친구에게 한마디 했다. “난 네가 우리 옆에 앉을 때, 웬 호호할머닌가 했어.”라고. 그 말에 모두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제야 모인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만하면 모두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석이도 머리만 벗어졌을 뿐, 피부는 윤기 있고 솜털 보송하던 소년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 착각한 것은 건강이다. 진단서를 발급받을 일이 생겨 병원에 갔다. 집에서 정상이던 혈압이 무척 높게 나왔다. 두 번 세 번 재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혈압약 복용을 권했다. 혈당도 상상 외로 높았다. 아픈 데가 손목 말고 없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혈당도 집에서 가끔 재는데 약간 높긴 해도 우려할 정도 아니었다. 갑자기 힘이 빠졌다. 집에서 체크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건강하다고 착각하며 산 걸까.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혈압을 재고 혈당 체크를 했다. 병원보다 확실히 낮게 나왔다. 하지만 아주 마음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혈당이 문제다. 요즘 연말 모임 때문에 매일 한두 끼씩 외식을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마음이 무겁다. 지금까지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산 것만 같다. 미리미리 체크하면서 관리했다면 지금처럼 이렇지 않았을 텐데. 후회와 반성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종일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저녁에 아들이 돌아와서 포옹하며 어리광을 부렸다. 나도 모르게 싸늘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내가 언제까지나 젊고 건강하겠니? 나도 힘들어, 기대지 마!” 아들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급 미안. 다시 포옹했다. “고생했어. 미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아들이 물었다. 낮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에이, 저와 같이 다시 관리 시작하면 되죠. 요즘 외식이 잦아서 그럴 거예요.” 아들이 다시 포옹했다. 저녁에 포옹만 세 번이다. 그러면 서로에게 힘이 된다고 착각하는 걸까. 또 건강은 관리하면 금세 좋아지는 거라고 착각하는 아들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긍정의 힘, 그걸 믿으리라. 오늘 아침부터 식단을 바꾸었다. 운동 시간도 늘리기로 했다. 강도 있는 운동과 약한 정도를 섞어서 두 시간으로. 매일 혈당과 혈압을 재면서 관리할 생각이다.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이 처방 받아 약물 치료를 해야 하리라. 아직은 병으로 확진받은 건 아니니까, 관리하면 개선될 수 있을 것 같다. 착각일까. 착각이라 해도 해보는 데까지 노력하리라. 


그랬다. 확실히 나는 젊다고 착각했고, 건강하다고 착각했다. 저번 친구들과 모였을 때도 목격했다. 보통 한두 가지 약을 다 먹고 있던 것을. 그때도 난 약 먹는 게 한 가지도 없다고 큰소리쳤는데, 그 모든 게 착각이었다. 내 몸속은 벌써 변화하고 있었다는 걸 놓치고 있었다. 착각의 늪에 빠져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피곤을 자주 느꼈고, 가끔 머리가 아픈 것도 같았던 착각이 든다. 잘 모르겠다. 미리 짐작하지 말자. 착각엔 커트라인이 없다더니, 요즘 내가 착각만 하며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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