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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Dec 31. 2023

젊은 두 남자와 멋진 마무리


오후에 산책하러 나왔다. 아파트 동 앞길은 어제 내린 눈이 녹아 질퍽거려 미끄러웠다. 자칫 잘못하여 넘어질까 봐 조심조심 걸었다. 어제 만들어 세워두었던 눈사람은 벌써 거의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날씨는 춥지 않았다. 주목나무 빨간 열매가 올망졸망 꽃처럼 붙어 있다.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금세라도 눈이나 비가 내릴 듯했다. 포근한 날씨 때문일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이라서 그럴까, 아파트 주민들이 많이 나와 오고 갔다. 불 꺼진 트리 전구가 야광나무 가지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옆 동으로 해서 서너 동을 더 지나면 개울 산책로가 나온다.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상했다. 우리 동 옆 동부터 질퍽대는 눈이 다 치워져 길이 보송보송하게 마르고 있는 게 아닌가. 양지쪽이라 그럴까, 그렇지 않다. 우리 동도 양지쪽인데. 몇 걸음 더 걸으니 젊은 사람 둘이 녹고 있는 눈을 넉가래로 치우고 있지 뭔가. 두 남자였다. 삼십 대나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뉘 집 아들일까. 뉘 집 남편일까. 눈이 치워진 것으로 볼 때, 자기 집 앞길만 치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관리소 직원들일까. 공휴일인데 나와서 저렇게 눈을 치울 수 있을까. 그건 아닌 듯했다. 두 젊은 남자는 분명히 어느 집 아버지일 것 같았다. 아이들이 다니다가 넘어질까 봐 자기 동 앞의 눈을 치우기 시작했으리라. 그 모습을 본 다른 한 사람이 동참하게 된 것일까. 어쨌든 그들의 마음이 읽혀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 두 사람의 앞을 지나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둘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네,라고 했다.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다. 넉가래로 눈을 긁어 한쪽으로 모으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은행나무 옆으로 눈을 모으고, 한 사람은 잔디가 깔린 쪽으로 눈을 밀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은 무거우리라. 자기 동 앞만 눈을 치우려던 생각이었을 텐데, 옆 동으로 옆 동으로 계속 범위를 넓히게 된 걸까. 처음부터 다 치울 생각을 했다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고운 마음이 고마워 커피라도 사서 건네주고 싶었는데 실천하지 못하고, 개울가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 같다. 지난가을까지 피었던 달맞이꽃 군락지를 지나 왜가리 놀이터까지 왔다. 왜가리와 물오리가 하천 여울 아래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저들도 올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회의하는 걸까. 보통 때보다 많은 무리가 모인 게 예사롭지 않았다. 한참 서서 그들을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얘들아, 너희들 덕분에 산책이 즐거웠어. 새해에도 건강하기를 바랄게,라고. 


개천 산책로는 다 녹았다. 드문드문 눈이 질퍽하게 녹아 있을 뿐, 길은 거의 말랐다. 포근한 기온이 그렇게 녹여놓은 모양이었다. 또 햇볕도. 산책로를 걸을 때 잿빛이었던 하늘은 어느새 개고, 파란 얼굴을 내밀었다. 개고 있는 구름 속에서 해가 나와 햇볕을 뿌려댔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과 언덕엔 눈이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걷는 산책로엔 눈이 거의 없었다. 산책자들은 많았고. 


걸으며 생각했다. 눈을 치우는 두 젊은 남자는 올해의 마무리를 멋지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공휴일에 쉬고 싶고, 가족들과 함께 재밌게 지내고 싶을 텐데, 가족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니. 이처럼 멋진 마무리가 또 있을까. 만약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 해도, 신은 오늘의 그들 행위를 보고, 칭찬을 했으리라. 저렇듯 멋진 생각을 하고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나는 어떻게 올해를 마무리할까. 성찰할 게 많다. 소아적 삶을 사는 나를, 반성해야 한다. 또 아직 앙금처럼 남아 있는 문제들도 해결해야 한다. 평소보다 더 많이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탄천 앞에 섰다. 물은 한강으로 흘러간다. 깊은 물에 시선을 던지고 한참 서 있었다. 물가 나무는 봄을 잉태하고 길게 물을 빨아올리는 것 같았다. 겨울이 깊어지기도 전에 저렇듯 봄을 준비하는 나무. 나도 어서 올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해야 하리라. 


발걸음을 돌렸을 때, 마음은 가벼워져 있었다. 마무리든 시작이든 얽매이지 말기로 했다. 다 못한 건 이어서 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건 성실하게 해 보기로. 마른 갈대가 가볍게 손짓했다. 더 유연해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양지바른 곳엔 개망초와 풀이 파릇하다. 저런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것이리라. 연약한 저 풀이 품어내는 파릇한 빛이 희망차 보였다. 


아파트로 들어와 우리 동 앞에 다다랐을 때도, 두 젊은이는 여전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우리 동 앞이 마지막인 것 같았다. 볼이 발그레한 두 남자에게 다시 또 말했다. 고맙다고. 남자들은 아까처럼 네,라고만 대답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 내 주변에 저런 이들이 있다는 게 든든했다. 올해를 멋지고 아름답게 마무리한 저들의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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