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아들은 여행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본인은 정작 가지 못하니까 남들이 여행하는 것이라도 보려는 것인지. 안 된 마음이 들어 말을 건다. “엄마랑 같이 저기 갈까?” 아들의 반응은 즉각 나온다. “싫어요, 혼자 갈 거예요.” 나도 안 된 마음을 즉각 접는다. 짝사랑은 소모적이다. 어떤 이는 경제적이고, 멈출 때 멈출 수 있는 게 짝사랑이라지만 이제 그러고 싶지 않다. 그 짝사랑에 마음과 에너지를 소비할 여력 없다.
혼자 하는 여행이 바람직한 면 많다. 나도 혼자 잘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어미하고 가는 것도 싫단 말인가. 갑자기 섭섭한 마음이 든다. 다시 대시. “비용은 내가 다 낼게. 프랑스나 이태리 가고 싶잖아. 경비는 내가 다 낸다구.” 아들은 미동도 않는다.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등장인물들을 보며 웃고 박수친다. “여행 경비 얼마든 내가 낸다니까.” 나도 고집이 있다. 끝까지 밀어붙인다. “싫어요. 혼자 가고 싶다니까요. 제가 벌어서 갈 거예요.” 프로그램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한다. 다시는 그런 말 하나 봐라. 나도 혼자 가는 게 편하거든. 중얼중얼.
“엄마, 저기 보세요. 원주민들과 같이 춤추는 거 엄청 웃기죠?” 여전히 화면을 응시하며 묻는다. “아니, 안 웃겨. 네가 더 웃겨. 징그럽게 웃겨.” 쏘아붙이고 거실로 나와 내 전용 텔레비전을 켠다. 여기저기 채널마다 여행상품을 팔고 있다. 늦은 저녁엔 어김없다. 우리나라 홈쇼핑처럼 여행 상품을 많이 파는 곳이 또 있을까. 인터넷도 접속만 하면 여행상품을 판다. 아, 우리 민족이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건 익히 알지만 이렇게도 여행을 좋아하는 민족이던가.
중국, 북해도, 동유럽, 서유럽, 베트남, 태국, 백두산, 제주도, 울릉도 등, 세계 곳곳 우리나라 곳곳 여행하기 좋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듯, 큰 손해라도 날 듯, 유혹하고 또 유혹한다. 이번 겨울에는 동유럽에 갈까, 베트남엘 갈까, 겨울 울릉도 풍경 대단할 거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이 궁리 저 궁리하다 마음만 산란해 텔레비전을 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조금 전에 보았던 여행 상품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벼르기만 하다 못한 해외여행, 퇴직하면 마음껏 다닐 거라고 계획했지만 아직 발도 떼지 못한 현실이다. 더 바쁘기도 하지만 며칠씩 길게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이나 장기여행을 할 정도로 시간을 빼려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하루 이틀만 할 수 있는 곳은 어떨까 싶지만 그럴 바에는 집 근처 산이나 유적지를 찾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 못 가고 저래 못 간다.
아들도 그럴 거다. 일주일 빠듯하게 짜여 있는 일정에서 하루를 빼기도 힘든데, 어떻게 며칠씩 뺀단 말인가. 물론 다 제쳐두고 가면 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후, 닥쳐올 여러 가지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힘들다. 맡은 일에 차질을 초래하면서까지 여행을 해야 할 일은 아니다. 누구는 여행이 가장 후회 없는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상황 나름이고 환경 나름일 터다. 그건 아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 둘은 일박이일도 벼르기만 하고 못하고 있다.
아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같이 계획한 게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일박이일이라도 여행하기였다.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못했다. 계획대로였으면 세 번쯤 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심지어 하루 여행도 못했다. 시골에서 한 친척 결혼식에 다녀온 것도 여행이라면, 온이네 같이 다녀온 것도 여행이라면, 세 번쯤 한 것 같다. 그런 때도 우리는 설렜다. 차에 오르기만 하면 아들은 한없이 여유롭고 부드러워진다. “우리 다음 달에는 꼭 일박이일 가요, 엄마 좋아하는 강릉으로 갈까요?” 먼저 말을 한다.
그래 놓고 해외여행은 혼자 가고 싶다니 그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혼자 가서 전시회, 미술관, 박물관을 실컷 보고 싶단다. 나도 그런 곳 좋아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함께 가기 싫다는데, 그것도 경비까지 다 댄다는데 싫다고 하니, 자존심 상해 못하겠다. 우리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소망이 아들과 루브르 박물관 가고, 산토리니 가고, 산티아고 순례길 걷는 건데 말이다. 호기롭게 포기.
잠이 오지 않아 아들 방문을 살짝 열었다. 아직도 여행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그만 자! 피곤하다며 말뿐이구나. 난 너 때문에 늘 수면부족이야!” 공연히 쌩콩허니 말했다. “네, 걱정 말고 주무세요.” 화면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아들이 대답한다. 치사한 것! 그래도 다시 말해본다. 목소리를 나긋나긋하게 해서. “아드을, 우리 저기 같이 가볼까? 경비는 물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엄마가…….” 말도 끝나기 전에, 말이 흙고물 묻을까 봐, 아들이 즉각 대답한다. “아뇨, 사절합니다.” 짝사랑, 이제 나도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