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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고 싶다

교양

by 최명숙


아들과 동거하는 건 비교적 괜찮다. 세입자고 하숙생이고 떠나, 이젠 그냥 집 나가기 전 내 아들로 돌아오고 말았으니까. 아무리 이것저것 경계를 짓고 따져도 제대로 안 된다. 흐지부지 다 허물어지고 말았다. 경제공동체가 된 것은 물론, 이제 문화공동체까지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다 괜찮다. 가끔 속 뒤집어지는 의견충돌만 생기지 않는다면. 내 속으로 낳은 자식도 이 모양인데, 남남이었던 부부가 함께 가족공동체를 이루며 큰 충돌 없이 사는 건 사리를 만드는 일 아닌가.


가끔 부딪치는 게 의식과 견해 차이가 생길 때다. 그 의식이란 건 도대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왜 나와 정반대인 경우가 그리 많은가. 견해 차이는 토의나 토론을 통해 조율할 수 있으나 의식이 다른 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엄마는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하면서 염장을 지르면 부아가 치민다. 내가 얼마나 고루하지 않은 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살았는데 그런 말을 듣는단 말인가. 일부러 내가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 거 아니냐고 억지소리를 하면, 아들은 대꾸하지 않고 피식 웃고 만다.


둘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사람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더니, 아들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거란다. 하기 싫은 일은 안 할 거라나. 참나 원! 살다 살다 이 나이 되도록 이렇게 애 같은 말을 하는 게 맞느냐며 충돌했다. 부아가 치밀어 등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일촉즉발. 간신히 참았다. 등을 때려봤자 내 손만 아플 게 뻔했고, 이제 나아가고 있는 손목에 무리라도 가면 나만 손해다.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느냐는 게 내 지론이다. 아들은 하기 싫은 걸 왜 억지로 하냐는 거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해도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나. 이게 올해로 만 마흔두 살 된 아들과 주고받을 이야긴가. 가정 꾸려 아내와 아기를 책임져도 질 나이에 철없는 소리만 해대는 아들을 어쩐단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살면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을 얼마나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가. 세상에는 그런 일이, 하고 싶어 하는 일보다 훨씬 많지 않던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칠 뿐이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결혼하지 않으면 애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말이다. 왜 모든 게 결혼 이전과 이후로 갈리느냐는 거다. “네 의식이 문제야!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떻게 험한 세상을 산단 말이니?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게 성숙한 태도고 교양이야!” 좋지 않은 말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갑자기 파안대소했다. 왜 웃느냐고 물었다. “교양을 그렇게 설명한다는 게 웃겨서요. 기발하긴 하네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게 교양이라니.” 내가 덧붙였다. “맞잖아. 하고 싶어도 안 해야 할 건 안 하는 게 교양이기도 해.” 교양 논쟁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자기도 하기 싫은 일을 아예 안 하며 사는 건 아니란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고 속상하다는 거다. 나는 슬프고 속상하지 않을 방법이 있다고 했다.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거야. 너도 알잖아. 간단해!” 내 말에 아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견디며 사는 거라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사는 게 아니라고, 그걸 아직도 모르느냐고, 내친김에 몰아붙였다.


속상했다. 나라고 왜 모르겠는가. 아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금 아들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도 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들 입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할 거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가슴 아파서 하는 말이고,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한 말이다. 누구나 그렇다고 일반화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아들의 심기를 건드린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들이 하고 싶은 일, 그건 단 하나다. 작품 활동만 하는 것. 안다. 무척 잘 안다. 그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데, 그렇게만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입시학원 강사로 일정액의 수입을 얻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다는 거다. 일주일에 삼사일 강의하는 게 가끔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든단다. 학생들이 귀엽고 그 일이 재미도 있다면서.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건 모든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글만 쓰고 싶거든. 평생 그랬어. 가정경제를 책임지느라 못한 거잖아. 지금도 그래, 나도 글만 쓰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 내 말을 듣고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아들이 갑자기 나를 안아주었다. “이제부터 쓰세요. 엄마는 연구와 교육도 좋아하시잖아요. 아닌가요? 엄마만큼만 돼도 좋겠어요, 저는.” 아들은 마음이 급한가 보다. 내 모성을 자극했다.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림만 그리며 살게 뒷바라지해 줄까, 대책 없는 모성이 솟구쳤다. 워, 워, 워.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 그게 부지기수인 게 인생이다. 아들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단다. 현재를 그 준비 기간으로 알고. 서로 약간 할퀸 부분이 있었지만 이만하면 잘 마무리되었다. 아들에게 억지 쓴 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노력하다 보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들의 삶을 채우리라 믿으며, 나도 아들을 안아주었다. 봉합, 일촉즉발의 상태에서 잘 봉합되었다. 조금 터트린 것 같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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