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아들이 국립박물관에 가자고 했다. 선뜻 승낙. 아들과 같이 박물관에 가다니,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다. 아들과 국립박물관에 가던 날,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았다. 봄날처럼 화창한 기운이 감돌기도 했다. 커피와 과일, 한과와 견과류 조금, 간식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시내로 나갈 때는 자차보다 그게 낫다. 집 앞에서 버스 타고 양재에서 한 번 갈아타면 국립박물관 앞에서 내린다. 간식 담은 가방을 아들이 등에 메었다.
국립박물관에 몇 번 다녀왔지만 아들과 함께 가는 건 처음이다. 아들은 버스에 타고 내릴 때마다 엽렵하게 나를 챙겨주었다. 조심하세요, 힘들지 않으세요? 슬몃 웃음이 나왔다. 내가 꼭 노인이 된 것 같아서. 아직은 괜찮아, 너나 조심해. 내 말에 아들이 쿡쿡 웃는다. 대낮에 이렇게 빛깔 고운 하늘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단다. 날마다 작업실에서, 학원에서 지내다, 오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오니 안 그러랴 싶어 가슴이 싸해졌다. 안쓰러워서.
박물관 연못 앞 의자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아들은 몇 번이나 감탄했다. 날씨에, 하늘에, 나무에, 물에, 햇살에. 감성적이어서 그럴까.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미소 띠며 쳐다보고 사진을 찍어댔다. 예쁘죠? 참 곱네요. 엄마, 저기 서보세요, 사진 찍어드릴게요. 아들은 어릴 적에도 말이 많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식탁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댔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느끼고, 표현하고 싶어서 어떻게 견뎠을까.
간식을 먹던 아들이 대뜸 제의를 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엄마를 위해 쓸 생각인데 어떠냐고. 약속할 수 있단다. “감정대로 하지 마. 나중에 후회할 약속일 것 같은데. 일주일에 하루라니, 한 달에 하루도 쉽지 않을 거야.” 내 말에 아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럴 리 없다면서. 감정에 충실한 약속이라는 걸 모르진 않으나, 나도 저도 시간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한 달에 하루로 하자. 그 약속도 지키기 쉽지 않을 거야.” 아들은 보름에 하루로 하자며 흔쾌히 약속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두고 보자고, 그게 어디 쉬운 줄 아느냐고.
맛있게 간식을 먹고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곳이 2층에 있는 ‘사유의 방’이니 거기부터 보자고 했다. 사유의 방에 들어가 반가사유상을 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번뇌가 멈춘 듯 평안이 밀려왔다. 한동안 꼼짝 않고 보았다. 옆에 선 아들의 입에선 연신 가느다란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참 정면을 보고 느릿느릿 걸어 옆과 뒤까지 보고 느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이 계속 파문처럼 번져갔다. 아들이 내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하지 않았으나 같은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1층에 전시된 선사시대부터 대한제국 유물까지 찬찬히 세 시간 정도 살펴보았다. 몇 번이고 본 유물인데 느낌이 또 달랐다. 아들이 역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미처 몰랐다. 서로 잘 아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묻기도 했다. 공예품이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해 줄 때 아들의 표정이 진지해서, 꼭 내가 수업을 듣는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1층 전시실을 보고나니, 벌써 시간은 오후 4시 가까이 되고 있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3층 전시장은 다음에 보기로 했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박물관에서 나오는데 다리가 뻐근했다. 긴 시간 서 있어서 그런가 보다. 아들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땠느냐고.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고 하니, 자기는 가슴이 벅차서 말로 다할 수 없을 것 같단다. 앞으로 자주 박물관이나 역사관 탐방을 하잔다. 일주일에 하루를 나 위해 쓸 생각 말고 널 위해 쓰라고 했더니, 씩 웃었다.
얼큰하고 시원한 생태찌개를 먹으면서도 아들은 박물관 이야기를 계속한다. 봄에는 경주에 같이 가고 싶단다. 신라 유물과 유적을 보러. 기꺼이 동행하기로 했다. 시간이 맞을지 그건 아직 모른다. 마음이 문제이긴 하다. 아들에게 가고 싶은 곳을 모두 적어보라고 했다. 부지런히 다니며 보아야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고. 아들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면서. 선조들의 유산을 살펴보는 건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다. 놀라움과 함께 자긍심까지 갖게 된다.
일주일에 하루를 날 위해 쓰겠다는 아들의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안다. 한 달에 하루도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래도 흐뭇했다. 어미를 위해 시간을 쓰겠다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집 떠나 혼자 살면서 때론 힘들고 때론 자유로웠을 아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이제 새삼 느끼는 듯하다. 이러다 보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 들지 않을까 싶어, 당분간 아들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다.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박물관 앞 연못, 간식 먹던 곳에 찾아온 비둘기들, 꽃눈을 깊이 감춘 매화, 오가는 관람객들, 건듯 부는 바람, 고운 하늘빛이 눈에 선하다. 앞으로 우리는 매화꽃이 하얗게 웃으며 진한 향기를 온 누리에 날리는 날, 3층 전시관을 보러 다시 박물관에 갈 생각이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아들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