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

양심

by 최명숙

내 속에선 ‘또 다른 나’가 나를 간섭한다. 누구보다 심한 검열자다. 사람들은 무섭지 않으나 ‘또 다른 나’는 무섭다. 나를 검열하는 그 자를 피할 수도 없다. 그 자만 없다면 무슨 짓이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아주 만무방처럼 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금은 모든 의식과 행동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거다. 그 자유가 때론 방종일지라도. 하지만 그 또 다른 나 때문에, 그 자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렇게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를 갖지 않은 이 있을까. 모두 절제하고 통제당하며 살고 있다. 절제하는 건 자발적인 것이고, 통제당하는 건 비자발적인 것이다. 또 다른 나는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통제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날뛰는 송아지를 붙잡는 일이 어디 쉽던가. 아니, 발버둥 치는 어린 아기를 제어하기도 쉽지 않다. 온몸에 땀이 흐를 정도로 힘을 써야 가능한 일이다. 그럴진대 ‘또 다른 나’의 역할을 어떻게 쉽다고 단정할 수 있으리.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를 통제하는 일이니.


그걸 잘해야 한다. 또 다른 나의 검열과 통제를 잘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 만무방이나 망나니가 되고 말지도 모른다. ‘또 다른 나’를 따르라. 그자를 따르면 ‘종심소욕 불유구’가 될 수 있을까. 공자님은 칠십 살에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다고 고백한다. 나도 그럴 수 있으리라곤 장담할 수 없다. 성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니까. 그래도 그걸 추구한다.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쁜 마음이나 양심에 어긋나는 건 아예 마음조차 먹지 않는 일이므로.


나는 ‘또 다른 나’의 정체를 ‘양심’이라고 본다. 물론 또 다른 나가 실제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겉과 다른 속마음, 속과 다른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 표정, 일처리, 교언영색 등등이 또 다른 나일 수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나를 검열하고 통제하는 양심만 가지고 글을 전개하련다. 사람들의 생각이 하도 다양하므로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언제나 경계한다.


평생 나는 그 또 다른 나에게 시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준법정신이 강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는 나는 주위사람들 말에 의하면 ‘스스로 신세를 들볶는 부류’에 속한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아도 그 말이 맞는 듯하다. 그냥 넘겨도 괜찮을 일을, 누가 알 것도 아닌 일을, 또 다른 나가 지켜야 한다고 지시하면 그대로 따른다. 따르지 않았을 땐 더 고통스럽기 때문에 차라리 따르는 게 낫다.


한 예로, 운전할 때 아무도 다니지 않는 시골길 신호등도 나는 꼭 지킨다. 천지사방 둘러봐도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다니지 않을 때인데도. 유턴이 안 되는 곳에선 멀리 돌아가게 되더라도 유턴하지 않는다. 속도 또한 신경 써서 지킨다. 함께 동행하던 친구가 왜 이렇게 소심하게 운전하느냐며 자꾸 속도위반, 신호위반을 종용했다. 그냥 가, 돌려 돌려버려. 속도를 더 내, 아무도 없잖아,라고. 그 친구를 동승시킨 게 후회되었다. 참다, 참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너! 내려! 소리쳤다. 친구가 사정해서 목적지까지 가긴 했지만 그 정도로 교통법규를 지킨다. 친구는 법은 어기라고 있는 거라며 날 놀렸다.


그 일뿐 아니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또 다른 나의 검열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질 때 있다. 법이야 그렇다 해도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것에서 그 자의 검열과 통제는 더 심하게 드러나는 게 보통이다. 가위눌릴 때 있을 정도다. 누가 보는 것 아니고 아는 것도 아닌데, 양심에 걸리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아전인수 격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 때 있다.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수라는 생각이 들 때 없는 건 아니나, 그게 어렵다. 그러니 스스로 신세를 들볶는 일이 아니고 뭔가.


나이가 들면 더 유연해지고 이것저것 수용도 해야 할 텐데, 나는 더 까다로워지는 것 같아 통탄스럽다. 남보다 나 스스로에게 더 심하다. 또 다른 나의 검열을 피할 순 없을까. 지금까지 들어왔던 ‘정직’을 벗어버리고 싶을 때 있다. 정직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 아니고, 정직을 선으로 봐주는 세상도 아닌데, 난 왜 그런 걸까. 유연하지 못해서 그런 듯도 하다. 권도(權道)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마음에선 또 다른 나가 그 권도를 수용하지 않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래도 또 다른 나의 검열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본다. 그 때문에 이나마 사람노릇하며 사는 게 아닌가 해서다.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다면 틀림없이 만무방이 돼버렸을 테니까. 나를 간섭하고 검열하고 통제하는 그 자에게 친밀감을 갖는다. 나와 또 다른 나가 통합되는 느낌도 받는다. 서로 좋은 관계 속에서 삶의 골짜기 곳곳에서 만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며 나아가리라. 실리를 따르기보다 부끄럽지 않은 쪽을 선택하게 하는 것도 그 ‘또 다른 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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