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

by 최명숙


친구네 텃밭에 도라지꽃이 한창이다. 보라 꽃과 흰 꽃이 섞여서. 함초롬히 비를 맞고 피어 있는 꽃, 청초하다 못해 신비롭다. 정신을 빼앗겼다. 그렇게 예쁘냐는 친구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동요를 흥얼거렸다. 도라지꽃은 보랏빛 언니가 좋아하는 꽃 나리꽃은 빨간빛 내가 좋아하는 꽃 ♫. 친구가 빙그레 웃더니 따라 부른다.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고개까지 까딱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전에 친구가 말했다. 시골에 집을 지었는데 텃밭이 너무 넓어 농사짓기가 힘들다고. 더구나 직장 다니며 짓는다는 건 고역이라고.

좋은 방법을 일러주었다.

“밭에 도라지 씨를 부려. 그럼 몇 년 동안 농사짓지 않아도 돼. 여름에 꽃이 피면 또 얼마나 예쁘겠어. 도라지꽃 피면 놀러 갈게.”

친구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도라지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2년 만에 가게 되었다. 아쉽게도 도라지 밭이 너무 작았다. 힘들어도 푸성귀와 잡곡을 심느라 그런 모양이다. 300여 평이나 되는 텃밭에는 옥수수, 호박, 상추, 고추 깨, 콩 등의 잡곡과 갖가지 채소가 빼곡하니 심겨 있다. 그 한쪽에 피어 있는 도라지꽃. 시골의 정취와 여유로움을 함께 선사한다.


우리 외가의 텃밭에도 도라지가 있었다. 여름방학 대부분을 외가에서 보냈던 나다. 그러면 도라지꽃이 핀 텃밭에 이모와 자주 갔다. 이모가 반찬으로 쓸 호박이나 오이 등을 딸 때 나는 도라지꽃을 땄다. 풍선처럼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덜 핀 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렸다. 퍽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내 가슴도 터지는 듯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 공연히 두근거리고 내면이 자라는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가슴이 부끄러워 어깨를 움츠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럴까. 도라지꽃을 볼 때면 그 소녀 적 순수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등산을 하면서도 여름이면 보게 되는 꽃이 도라지꽃과 나리꽃이다. 야생 도라지꽃은 풀 섶에 숨어 있다. 그래서 일부러 도라지꽃이 핀 곳을 택해 걷는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데도. 산길에서 처음 보라색 도라지꽃을 발견했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 곱고 순수한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고 보았다.


산에 핀 작은 도라지꽃은 탐스럽지 않지만 자연스러워서 좋다. 도라지꽃은 보랏빛 언니가 좋아하는 꽃 ♫.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에 오른다. 그러면 무더기로 핀 다홍빛의 참나리꽃을 만나게 된다. 내 노랫소리는 더욱 커진다. 나들이 옷 갈아입고 외할머니 댁에 갈 때면 ♫. 이 부분에서는 눈물이 나올 듯 콧등이 시큰해온다. 그리운 외할머니와 이모가 생각나서. 외가의 텃밭에 피어있던 도라지꽃도.


언젠가 흥에 겨워,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참 어이없는 일이고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사람들이 좋다며 걸음을 멈추었다. 풀 섶에 수줍은 듯 핀 보랏빛 도라지꽃과 저만치에 무더기로 핀 참나리꽃을 보며, 나는 소녀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노래를 불렀다.


산새들이 포릉포릉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고, 시원한 하늬바람이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었다. 한 사람은 따라서 노래를 불렀다. 도라지꽃과 나리꽃도 꽃대를 흔들며 장단을 맞추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자연, 그 자연 속에 자연의 일부인 우리가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우리는 일행이 되어 함께 산행을 했다.


나와 함께 등산하던 친구가 가끔 그날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해서 무척 당혹스러웠다고. 멍석을 펼쳐 놓아도 하기가 멋쩍은데 기이한 행동이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나도 왜 그랬는지 그걸 알 수 없다. 혹시 도라지꽃 때문인 건 아닐까. 외가의 텃밭에서 도라지 꽃망울을 터뜨리던 순수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그 순수가 퇴색하고 변질된 오늘의 나를 그날로 되돌리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으로서. 아무튼 나는 보랏빛 도라지꽃을 보면 소녀가 되고 만다. 현재의 나이와 아무 상관없이.


친구는 어느새 옥수수를 수북하게 따놓았다. 갈 때 갖고 가라며. 나는 여전히 도라지꽃 앞에 서 있었다. 산자락에는 비구름이 걷히고 하늘 저쪽이 훤해진다. 이제 장마도, 여름도, 끝나겠지. 뜨거운 태양 아래 도라지꽃은 더 활짝 피어나고 보드라운 꽃잎은 반짝거리리라. 도라지꽃만큼이나 순수했던 날들을 안고, 나의 삶도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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