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이 밝았다. 아들이 먹고 싶다는 밀푀유나베를 만들기로 했다. 전날 마트에 가서 재료를 알뜰하게 빠짐없이 사 왔다. 생전 처음 해보는 특식이다. 어렵진 않았다. 전골냄비 바닥에 숙주나물 깔고, 노르스름한 배춧잎, 고기,깻잎을 켜켜로 쌓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동그랗게 담은 후, 육수 붓고 끓여 익히면 된다. 이렇게 쉬운 요리를 생전 처음 해본다. 아들이 무척 좋아하는 요리란다. 그걸 이 설날 아침에 하다니. 그것도 맏며느리가. 차례를 지내지 않고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그렇다. 우리 집에선 차례나 제사를 모시지 않은 지 이십 년 넘었다.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모두 조상을 기억하는 일이고, 산 사람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다. 안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본다. 제사 문화가 차차 사라지고 있으며, 모아서 한꺼번에 지내는 집도 허다하다. 시대가 변했으니까. 물론 지금도 격식에 맞춰 정성껏 제사를 모시는 가정도 있는 줄 안다. 그건 그대로 저건 저대로 다 괜찮다. 조상의 음덕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형식이야 어떻든 무슨 문제겠는가.
설날 당일엔 교통이 복잡할 것 같아서 전날 묘소에 다녀왔다. 신정 때 떡국을 끓여 먹었으니, 설날엔 그냥 넘어가자고 아들이 말했다. 대신 밀푀유나베를 해서 먹잔다. 추도예배 드리니까 차례 음식을 따로 만들 필요 없다. 흔한 전도 안 부친다. 또 명절을 쇠러 오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가족끼리 단출하게 보내면 된다. 딸이 결혼해 식구를 늘릴 걸 기대했는데, 딸은 딸이다. 시집가고 나니, 명절에는 시댁 식구들과 지내느라 친정에 올 새 없다. 나도 일부러 올 필요 없다고 했더니, 아예 올 생각 안 한다. 다 괜찮다.
아들과 밀푀유나베 만들어 먹기로 한 건 그 참 저 참이다. 요즘처럼 요리하기 쉬운 세상이 있을까. 인터넷만 검색하면 모든 요리 방법을 다 알 수 있다. 알려주는 대로만 하면 기본적인 맛을 낼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막상 해보니 그냥 샤브샤브다. 재료를 켜켜로 쌓아 잘라 예쁘게 놓았다는 것뿐이지 흔한 샤브샤브 맛과 똑같다. 여러 가지 버섯을 더 넣었다. 멸치 육수 낸 것을 붓고 익혀, 소스에 찍어먹으니 제법 먹을 만했다.
아들은 아주 맛있단다. 최고라고 몇 번이나 엄지 척을 했다. 건더기와 숙주를 다 건져 먹은 후, 국물에 만두 몇 개와 떡 한 줌 넣고 떡국을 끓였다. 그것도 진미였다. 내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아들은 여러 번 사 먹어 봤는데, 이보다 맛있진 않았다며 부추겼다. 처음 시도한 것치곤 아주 성공적이었다. 하긴 이 정도 살림 경력이 있는데, 실패한다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엉터리 방터리라 해도.
아들은 끓이기 전에 사진 찍고, 다 익혀 먹기 직전에 또 사진을 찍었다. 가족 단톡방에 올릴 모양이었다. 익히기 전 사진이 선명해서 더 맛있게 보였다. 딸의 칭찬 메시지가 올라왔다. 참나, 이 나이에 아이들에게 칭찬을 듣다니, 좋아해도 되는 걸까. 솔직히 기분 좋은 일이긴 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잘한다는 말은 언제나 듣기 좋으니까. 유치해지는 것 같아서 혼자 빙긋 웃었다.
맏며느리가 이렇게 설날 아침을 보내다니 있을 법한 일인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십여 년 전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이렇게 문화풍속도가 달라지다니. 명절에 여행 가서 콘도에서 차례 지낸다는 게 사건화 된 적 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마음이 문제지, 형식이 문제냐며, 대부분 이해하고 넘어간다. 나부터도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음식이 식을까 봐 먼저 먹고 예배를 드렸다.
나도 이 나이에 신식 맏며느리가 된 걸까. 사실 맏며느리 노릇 하는 거 하나도 없다. 제사를 모시나, 차례를 지내나, 손님을 치르나, 시어른들은 결혼 후 얼마 안 돼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시어른들을 모시지도 못했다. 이 중에 하나라도 하고 있는 며느리는 괜찮은 며느리라는 생각이다. 그나마 한 것이라곤 시누 둘 시집보내고 시동생 공부시킨 거다. 물론 이십여 년 동안 제사와 차례를 모시긴 했다. 그것 말고 내가 한 건 미미하다. 집안 대소사도 알뜰하게 챙기진 못했다. 그냥 시늉만 냈을 뿐이다. 그러니 신식 며느리라 해도 엉터리밖에 되지 못한다. 아예 맏며느리 역할에 무관심해진 것이니 신식도 아니다.
설날 아침에 어느 나라 음식인지 모를 밀푀유나베를 만들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맏며느리 의무에 무관심한 것은 괜찮은데, 아무리 무관심하려 해도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마 아들과 맛있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느라 묘한 기분은 어느 새 사라졌다. 하루하루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이다. 설날이든 무슨 기념일이든. 맏며느리 역할에 무관심한 게 썩 걸리지 않는 걸 보니, 나도 나이 드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