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 딱 한 번 해보았다. 학교에서였다. 캠퍼스에 주차된 헌혈차에 무슨 생각으로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산수유가 노랗게 핀 교정엔 새내기들의 발걸음과 목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헌혈차 앞을 삼삼오오 모여 지나쳐가는 젊은이들, 나른하고 긴 봄날의 햇살. 나는 왜 생뚱하게 쓸쓸함과 죽음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피, 피는 생명이다. 내 피를 모르는 그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은 감상은 또 무엇인지. 그래서 주차된 헌혈차에 올랐던 걸까.
헌혈을 하고 났을 때, 약간 어지러웠다. 헌혈차에서 초코파이와 우유를 주었다.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밖으로 나오자 눈부셨다. 하늘은 청명했고, 산수유와 개나리가 어우러진 교정엔 여전히 학생들로 흥성거렸다. 불혹의 나이에 처음으로 헌혈을 해보다니, 헌혈의 필요성을 그렇게 많이 들었으면서도. 부신 눈을 비비며 주차장으로 갔다. 개나리 울타리 옆 주차된 차 안에서 우유를 마셨다.
공연히 눈물이 흘렀다. 옛날 생각이 나서다. 스무 살 언저리쯤이었을 때, 고향에서 동생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직장에 다니며 간신히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나는 월급을 모두 집에 보내느라 여유라곤 없이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동생의 편지에는 학비를 못 내서 학교에 못 갈 지경이라고 쓰여 있었다. 학비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동생이 학교에 못 가게 될까 봐, 마음이 보통 답답한 게 아니었다.
궁리 끝에 매혈을 하기로 했다. 당시 어려운 고학생들이 흔히 급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하던 방법이었던 듯하다. 내가 그 방법을 떠올린 걸 보면. 병원으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매혈을 하겠다고 말했다.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피검사인지 무슨 검사를 했다. 안 된단다. 빈혈이 심해서 피를 뽑을 수 없다고. 내가 빈혈이 심하다는 것보다 동생 학비가 더 걱정되어 괜찮으니 어떻게 할 수 없겠느냐고 사정했다. 간호사가 초코파이를 하나 주면서 내 등을 가만히 떠밀었다. 돌아가라고. 간호사의 안쓰러워하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돌아오면서, 암담한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해 한숨만 내쉬었다. 어떻게 해결했는지 그건 기억에 없다. 안국동 근처 아주 작은 내과 병원, 그 병원 입구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부끄러움 비슷한 걸 느꼈던 듯하다. 호기롭게 피를 뽑고 얼마간의 비용을 받아 동생 학비에 보탤 수 있었다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열악한 현실을 원망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병원 문을 닫고 나오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마흔 살 때 처음 헌혈하면서도 그 병원 입구를 떠올렸다. 그때 생각했던 쓸쓸함과 죽음은 빈혈이 심한 상태에서도 매혈을 생각할 정도로 절박했던 상황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까. 그 날들, 가여운 내 청년시절. 그날의 나에게 연민과 가여움을 느끼다니. 그때 빈혈 때문에 못한 매혈, 그 묘한 부끄러움 같은 감정을 헌혈로 씻었다고 할까. 아무튼 쓸쓸함과 죽음을 동시에 생각한 헌혈은 내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때 그 간호사의 진단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며칠 안 돼 빈혈로 쓰러졌다. 만약 그때 피를 뽑았다면 나는 그대로 내 삶이 멈추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 있다. 살다가 힘들어 견디기 힘들 땐 간호사를 원망한 적도 있다. 이제 알겠다. 내가 왜 처음 헌혈을 하면서 쓸쓸함과 죽음을 떠올렸는지. 이 무슨 생뚱맞은 생각인가 싶었는데, 모두 원인이 있었다. 이렇듯 인생은 모두 인과성에 의해 짜임을 갖게 되는 것인가. 소설처럼.
산책 나가다 보니 산수유가 피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삼월, 새내기들로 흥성거리는 교정에도 봄날의 길고 긴 햇살 같이 노란 산수유가 피어나리라. 내 기억 속의 그날도 산수유 꽃과 함께 떠오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는데 봄날 이렇게 산수유가 피면 어김없이 생각나곤 한다. 눈부신 봄볕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그런 날도, 별 부족함 없이 사는 지금도, 모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 삶이다.
지금은 헌혈을 권유하지 않는 듯하다. 시민의식이 성숙해서 그럴까. 헌혈차를 본 적도 없다. 헌혈하면 초코파이와 우유를 주는지도 모르겠다. 마흔 살 때 한 번 해보고 안 했으니까. 헌혈을 몇 백 번씩 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단 한 번 해본 헌혈의 경험이 왜 이렇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아무래도 봄날이어서, 산수유가 피어서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