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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Oct 15. 2022

그를 이해하기까지

문제는 나다 

         

그의 강의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와인색 셔츠 어깨 위까지 덮인 긴 머리카락, 안경 너머로 빛나는 큰 눈, 바리톤 음색의 목소리. 이 모든 것이 의지적이면서 자유로운 내면을 가진 그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와 너무 달랐다. 강한 이끌림. 강의까지 재밌다. 이십여 년 동안 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한 결과가 세상 밖으로 나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내게는 그랬다. 그의 강의에 대한 짧은 감상이다. 


강의 주제는 그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거였다. 그림 그리는 아들을 둔 내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그가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끌어오는 예화는 잊었던 시간과 기억을 소환하기도 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가득 차는 것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강의 그 자체보다 그에 대한 이해가 형편없이 낮았던 나를 발견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가 무척 외로웠을 것 같아서. 그 외로움을 통해 배우고 익히며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식견을 가졌을 테지만. 


외로움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나였고, 예술가에게 외로움은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 나였다. 몇 번의 내 도움 의지를 거절한 그를 그렇게 이해했던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외로움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외롭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마는, 갑자기 그 외로움의 크기를 줄여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면서 한 인간, 한 예술가의 고뇌와 노력을 진정성 있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다.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거니까. 지금까지, 그의 장래를 걱정하며 못나게도 남들과 비교했고, 순전히 나의 잣대로 그를 진단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랄까. 


그와 나는 생각이 잘 맞으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맞지 않았다. 그 이유를 찾지 못해 고심한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감성적인 면은 누구보다 잘 맞았다. 내가 쓰는 책마다 그가 표지와 삽화를 그려주었는데, 마음에 꼭 들었다. 내 생각을 그렇게 정확하게 표현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꼭 부딪쳤다. 큰소리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끝나는 때도 있다. 그것 때문에 십여 년 전부터 독립해 살고 있는 그와 같이 살고 싶다가도, 따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위무할 정도다.


고등학교 때까지 보였던 그의 모습에 내가 매여 있었던 것 같다. 착했고, 공부 잘했으며, 똑똑했다. 무엇보다 부모 말을 거역하지 않는 순종적인 아이였다. 정이 많아 눈물이 흔했고, 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의 동생은 착했지만 고집이 세서 속상하게 했던 것과 비교되어, 내 마음에 흡족한 그였다. 내가 바라는 대로 마음에 꼭 맞게 크는 그, 내 아들, 언제까지나 그럴 줄 알았는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들은 달라졌다. 아니, 그림을 그리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을 거다. 내면 깊숙이 침잠하면서 삶을 응시해야 하는 게 그림이니까. 그때부터 나와 아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겼던 듯하다. 아들은 묻는 것과 간여하는 걸 싫어했고, 자기 시간을 유난히 소중하게 여겼다.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보일 정도로.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쩌면 사십여 년 동안 노력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홍역처럼 꼭 겪어야 하는 게 사춘기의 방황이라고, 대학생이 돼서도 겪고 지나가야 할 것은 겪어야 하는 거라고, 결혼해서 속 썩이는 것보다 낫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중심적인 이해의 방식이었다. 아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 아니 사랑 없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들 역시 그랬을 터다. 모르지 않는다. 어느 아들이, 어느 어미가 불편한 모자관계를 유지하고 싶을까. 아들은 예민한 감성과 따뜻한 마음 때문에 내게 불손한 언행을 하면 1분도 안 돼, 죄송하다는 말이나 전화 그리고 문자를 하는 편이다. 그만큼 모질지 못한 성품을 가졌다. 그러면 슬그머니 화나 서운함이 풀리고 만다. 내 작품의 첫 독자가 되어주고,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아들인 것도 인정한다. 


강의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들었던 생각은 적어도 아들을 예전처럼 대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내 몸속에 하나의 탯줄로 이어져 있었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젠 한 인간으로, 예술가로, 대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인생을 응원하되 간섭하지 않을 거라는. 어미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그럴 수 없을지라도, 아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한 인간에 대한 이만큼의 이해를 하는 데, 사십여 년이 걸리다니. 살수록 어려운 게 인생이고, 이해가 어려운 게 가족관계라는 걸 새삼 느꼈다.


문제는 나였다. 저만큼 그 분야에 지식을 쌓고 자기만의 식견을 가질 때까지, 회화 작업을 하며 인간 본연의 외로움과 싸울 때까지, 그러면서 성장할 때까지, 나는 아들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사랑과 이해가 함께 조화를 이루었다면 달라졌을 텐데. 탯줄로 이어져 있는 상태처럼, 내 품에서 고이고이 자라는 아들만 고집한 것 같다.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이제 자기의 예술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내 아들을 믿으리라. 그리고 응원하리라. 그의 외로움까지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어미로서 감당할만한 역할을 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강의 내용 이해보다, 아들을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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