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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l 08. 2024

글쓰기에 불 지피기

글쓰기

  

책 한 권 읽고 토의 및 토론하는 독서모임에 참석했다. 물론 나도 책을 꼼꼼하게 읽었다. 진행자는 문학회 총무다. 총무가 선정한 작품인 듯했다. 십여 명이 모인 카페는 그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있었으나 그만하면 조용한 편이었다. 차분한 색깔로 꾸며진 내부가 평온한 느낌이 들게 했다. 커피 또는 차나 주스 등 취향에 맞는 음료를 주문하고 테이블마다 조각 케이크가 놓였다. 


먼저 한 사람씩 책 읽은 소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원들 대부분 책이 어려웠다는 반응이었다. 글쓰기에 열정을 갖고 있는 작가라는 건 알겠는데, 의미가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단다. 두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여서 나중에는 마음이 불편했다는 회원도 있었다. 두어 명만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고 했다. 전체 참여자의 80% 이상이, 어렵고 의미가 모호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글을 읽고 썼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하다고. 


나도 그랬다. 나처럼 읽고 쓰는 게 직업인 사람도 그런데 일반 독자가 왜 그렇지 않으랴. 회원들의 소감을 들으며 다시금 마음에 새겼다. 글은 작가와 독자의 소통이라는 사실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썼을 때, 독자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글은 잘된 글이라고 하기 어렵다. 물론 독자의 독서 수준을 무시할 순 없지만. 몇 번 읽어도 글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없다면 그건 글이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장은 멋있는데 글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아, 본인의 독서 수준이 한심했다는 한 회원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한다는 뜻이리라. 그건 사유가 깊고 내면화된 것은 맞는데, 다시 객관화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깊어진 사유를 문장으로 재구성하여 보여주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다. 산문의 특성 중 하나는 논리성이다. 내가 볼 때 문장이 논리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멋있긴 한데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깊은 사유를 객관화한 문장이어야 한다. 


또 하나는 쓸데없이 조사를 많이 붙인 문장들로 구성돼 있는 점이다. 아, 내가 글쓰기 강의할 때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는 게 바로 그 부분이다. 조사 ‘의’와 ‘을/를’의 사용을 남발하는 경우, ‘것’을 한 문장에 여러 번 사용한 경우 등. 우리가 읽은 책이 잘 읽히지 않은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한 문장에 ‘것’이 다섯 번이나 사용된 게 있고, ‘의’는 바로 앞에 사용했는데 또 이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목적격 조사 ‘을’과 ‘를’의 사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꼭 ‘을’과 ‘를’을 붙일 필요 없는 곳에도 어김없이 붙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문장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긴 문장이 자주 눈에 띄었다. 문장이 짧으면 호흡이 가빠지는 단점이 있으나 의미는 명확해진다. 두 행이 넘어갈 정도로 긴 문장은 비문이 되거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단문과 장문이 조화롭게 섞이면 바람직한데, 문장 숙련이 잘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쉽지 않다. 단문 쓰기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을 때, 장문 쓰기도 병행하는 게 좋다. 그러면 단문과 장문이 조화로워 글 읽는 재미와 의미 둘 다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읽은 책에는 장문이 자주 띄었는데, 의미를 더 모호하게 만드는 문장이 많았다.  


감동했다고 말한 회원이 뽑은 문장을 읽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문장들은 모두 간결하면서 깔밋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에 다가올 수밖에. 문장이 독자의 가슴에 닿으려면 그래야 한다. 미사여구나 현학적인 문장, 혼자 감상에 취하여 논리적이지 않은 어휘를 나열한 문장은, 독자에게 가 닿을 수 없다. 책 한 권의 문장이 모두 난삽하고 사변적이라면 도저히 읽지 못할 텐데, 간결하면서 깔밋한 문장들이 드문드문 들어있어 힘들어도 끝까지 읽도록 이끈 것이리라. 


그럼에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우게 되었다. 그 책을 쓴 작가에게. 바로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작가는 글을 쓰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있다는 걸, 글에서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런 상황 때문에 못 쓰고, 저런 일 때문에 못 쓴다는 게 핑계로 생각되었다. 허전했던 마음이 열정으로 가득 차올랐다. 갑자기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논어 ‘술이편’에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언(必有我師焉)이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으로, 어디서든 다 배울 게 있다는 의미다. 어떤 책을 읽어도 다 배울 점이 있다. 좋은 글이나 문장을 읽으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나도 그렇게 써야겠다 싶고, 그렇지 못한 글을 읽었을 땐 글 쓸 때 유의해야겠다고 깨닫는다. 


내 이야기에 회원들은 글이 왜 잘 읽히지 않았는지 알았다며, 속이 시원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 문장 쓰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배우고 깨달으며 독서와 글쓰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나도 회원들도. 완벽한 글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좋은 글은 부단한 퇴고에 의해 탄생되지 금방 뚝딱 만들어지진 않는다. 


글쓰기는 작가와 독자의 소통과정이다. 깊은 사유로 얻어진 문장을 객관화하여 글을 쓰고, 글쓰기 열정이 식지 않도록 계속 불을 지펴야 한다. 내게 불 지피는 행위는 독서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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