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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Oct 28. 2022

손주 봐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답 없는 논쟁


어느 모임에서였다. 손주를 돌봐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논쟁이 벌어졌다. 사실, 손주 봐주는 게 쉬운 일 아니다. 친손주든 외손주든. 봐주다 보면 관계만 나빠진다는 말도 있다. 어린이집이 있다고는 하지만 완전하게 해 줄 수 없다. 아무튼 이 문제는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치가들도 선거 때마다 다양한 공약을 내는 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까지 하자면 한도 없을 것 같다. 아무튼 가정에서 그것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손주를 봐줘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벌어진 논쟁이었다. 


크게 볼 때, 봐주면 안 된다는 그룹과 시간만 된다면 봐줘야 한다는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봐줘야 한다는 그룹에서는 전담하는 쪽과 필요할 때 봐주는 쪽으로 나뉘었지만 어쨌든 찬반으로 본다면 두 그룹이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한 논쟁이었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를 가족이 키웠다. 할머니 등에는 늘 아기들이 업혀 잠을 자고, 울었으며, 코를 문질러댔다. 할머니뿐인가. 고모의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저도 없을 때는 언니 등에 아기들이 업혀 있었고, 심지어 아기를 업고 학교에 가는 언니들도 있었다. 동생을 업어 키우는 건 여자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가정상황에 따라 삼촌이나 형들도 아이를 업고 안아 키웠다. 지금은 가족 구성원이 단출하다. 같이 살지도 않는다. 그러니 옛날과 같은 건 당연히 기대할 수 없다. 


손주를 봐주면 안 된다는 그룹에서 하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제 자식 자기가 키워야지, 나도 지들 키우느라 고생했는데, 손주를 봐준다는 건 절대 안 된단다. 차라리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주는 게 낫다고 했다. 틀린 말 아니다. 옛 말에도 새 본 공, 애 본 공은 없다고 했다. 이해 간다. 아무리 새를 쫓는다고 해도, 아기를 본다고 해도, 잠시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만큼 힘들다는 말이리라. 일 할래, 애 볼래, 하면 애 본다지 않는가. 그런 걸 알기에 손주 안 봐준다는 것이리라. 


어떻게 보면 이 그룹의 말이 맞는지 모른다. 영리하고 현명한 사람들이다. 사실, 손주 봐주다가 며느리, 딸과 사이만 나빠졌다는 이도 부지기수다. 남은 것은 병뿐이라지 않는가. 팔다리 관절 나빠지고 우울증 생기며 살만 찐다고. 그러니 차라리 양육비를 지원해주고 며느리나 딸이 집에서 아기 키우는 게 낫다는 말이다. 육아 휴가나 육아도우미 등을 활용하는 방안도 있지만 그것 역시 입맛에 딱 맞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똑똑하고 야무졌으면 좋겠다. 나는 시간만 되면 봐줘야 한다는 그룹에 속했다. 아기 키우는 일 만만치 않다는 것 잘 안다. 그래도 봐줄 상황이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정도면 아직 젊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무조건 손주 봐주면 안 된다고 입에 거품 무는 건 너무 야박하다. 


손주 봐줘봤자 좋은 소리보다 안 좋은 소리 듣기 십상이고, 다 크면 친밀도가 떨어져, 만나도 인사 꾸벅하는 게 다란다. 키워본 친구들이 하는 말이다. 그래도 키운 정이 있어 끊임없이 애정을 보내지만 손주들은 썩 그렇지 않단다. 그것도 인정한다. 예부터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말도 그래서 생긴 것이리라. 


그래도 시간만 되면 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문제만 생기면 딸네 집으로 불려 간다. 시도 때도 없이는 과장이다. 그러나 SOS를 치면 최대한 시간을 낸다. 강의나 공적인 일이 아닌, 개인적인 약속은 항상 다음 순위로 밀린다. 손자들이 먼저다. 누구보다 약속을 칼같이 지키던 나였다. 손자가 생기면서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손자가 아프다는데, 어린이집에서 하원을 못하고 있다는데, 내 볼일을 볼 수 없다. 공적인 일이 아니고 사적인 것은 항상 뒤로 밀린다. 


그래도 난 불만 없다. 딸에게 어미가 도움을 줄 있어 다행이다. 자랄 때 내 공부하고 일하느라 어미 노릇 못한 걸 이렇게라도 갚을 수 있으니. 또 아직도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뿌듯하다. 힘없고 아프다면 그도 저도 못할 노릇 아닌가. 아기 키우랴, 살림하랴, 남편 내조하랴, 거기다 직장생활까지 하랴. 슈퍼우먼처럼 사는 딸은 늘 잠이 부족하고 지쳐 있다. 그러니 내 형편이 되는 한 부르면 달려갈 수밖에 없다. 


거리가 가까우냐고? 아니다. 1시간은 족히 운전해야 갈 수 있다. 어느 땐 한 주에 세 번이나 불려 간 적도 있다. 그래도 차를 몰고 간다. 새 차로 바꿀 때 조금 더 비싼 하이브리드로 산 것도 그래서다. 유류비도 만만치 않았는데, 부담감이 훨씬 줄었다. 가끔 딸이 기름 넣으라고 챙겨주지만 그걸 받아오기 쉽지 않고, 받아도 다른 것으로 돌려준다. 어미 노릇도 제대로 못해줬으니 이것이라도 해야지 싶어서. 아, 그러고 보니 손주 안 봐줘야 한다는 사람들은, 엄마 노릇 제대로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의미 있는 건, 손자들 보는 재미다. 내가 가면 두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든다. 그렇게 지극한 환영을 어디서 받아볼 건가. 음식을 내 입에 넣어주고, 무릎에 앉으며, 등에 업힌다. 같이 놀고, 산책하며, 놀이터에도 간다. 노래를 같이 부르고, 장난도 친다. 둘이 싸우면 혼내고, 못된 짓 하면 엉덩이도 팡팡 패준다. 그래도 금세 웃고 나에게 매달린다. 크고 나면 데면데면해진다 해도, 지금 이렇게 엔도르핀 팍팍 나오게 행복감 주는 손자들을 어떻게 안 봐준단 말인가. 


손주를 봐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논쟁은 정답이 없을 것 같다. 각자 생각대로 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런다고 세금 내는 일도 감해주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나는 시간만 허락하면 손자 돌보러 달려가는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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