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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01. 2022

버리고 비워야 할 것들

쉽지 않은 일

      

버리는 것을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인생을 살면서 버리는 것만 잘해도 단순하고 명쾌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마음이 약해서 그런지, 결단력이 없어서 그런지, 좋게 말하면 정이 많아서 그런지, 무엇이든 버리지 못하는 게 병이다. 언젠가는 하루에 한 가지씩만이라도 버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 있지만, 작심삼일에 그치고 말았다. 


버려야 할 것들 가운데 첫째가 책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책 말이다. 맞춤법이 다르고 누렇게 바랜, 더구나 세로 쓰기가 되어 읽기 불편한, 그것도 글씨가 아주 작아 돋보기를 쓰고 읽어야 하는 책들. 어쩌다 한 번도 들춰보지 않는, 그저 책장에 장식처럼 있는 그런 책들. 아이들이 자랄 때 읽던 동화와 내가 결혼 전부터 갖고 있던 책. 그 책들도 버리지 못한다. 


이유는 있다. 아이들이 보던 책은 아들이 절대 못 버리게 한다. 어쩌다 한 번 오면 그 책들을 빼서 읽으며 키득거린다. 어느 책에는 낙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걸 보면서 옛날 생각이 나서 웃는단다. 자기들의 추억이 서린 책들을 절대 버리면 안 된다니 어쩌랴. 내가 결혼 전부터 갖고 있는 책도 그래서 못 버린다. 연필로 쳐놓은 줄, 어디서 보고 작게 써놓은 다른 이의 의견, 내 생각. 책장 끝에 적힌 책을 산 날, 산 이유, 마음. 내 추억까지 다 버리는 것 같아, 못 버린다. 


본격적으로 책이 많아진 건, 문학을 공부하면서부터다.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했지만 꼭 갖고 있어야 할 책들은 샀다.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 식견이 느는 것도 같았다. 지금은 책을 잘 사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매달 작가들이 보내주는 책이 적지 않다. 잡지도 있고. 그러다 보니 책은 날마다 쌓여간다. 우리 집에서 가장 큰방을 책이 가득 메우고 있을 만큼. 


물론 책방에 들어오면 마음이 뿌듯하다. 대부분 읽은 것들이므로. 물론 아직 못 읽은 것도 간혹 있지만, 머리글과 목차만큼은 다 본 것들이다. 가진 건 없어도 책만은 그래도 좀 갖고 있다는 것이 뿌듯한 것일까. 아무튼 그래서, 저래서, 나는 책을 버리지 못한다. 


비단 물품뿐이랴. 마음도 비워야 한다. 그게 힘들다. 살면서 비워야 할 것들이 많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속을 비워야 하고, 마음을 비워야 하며, 자리도 때가 되면 비워 줘야 한다. 또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모두 욕심과 관련이 깊은 것들이어서 비운다는 게 쉽지 않다. 


그중에 마음을 비우는 게 가장 힘들다. 뭐든 싹싹 비우지 않는 습관을 가진 나이니, 비우는 게 어디 쉽겠는가. 심지어 과일도 하나가 남으면 반만 먹고 남긴다. 다시 과일을 살 때까지 아주 떨어뜨리지 않는다. 통장에 잔고도 그렇다. 웬만해서 바닥이 나게 하지 않는다. 안 쓰는 게 낫지, 통장에 잔고가 없는 것은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려울 때도 예비비 정도는 꼭 남겼다. 그러니 마음 비우기 쉽지 않다. 


내게 서운하게 하고 부당하게 한 사람도 끊지 못한다. 서운한 거야 그렇다 해도, 부당하게 한 사람까지야. 그것도 욕심 아닐까. 사람에 대한 욕심. 인연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될 일인데, 그게 어렵다. 우유부단하게 생각되어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가 정이 많은 탓이라며 스스로 위무한다. 그래도 기분이 말끔하지는 않다. 


비워야 하는 것들 중에 속을 비우는 건 그나마 할 수 있다. 가끔 속을 다 비워야 건강에 좋다고 한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금식을 한다. 나도 물론 그렇다. 한두 끼 금식을 자주 하는 편이다. 전날 너무 과식했다 싶으면 다음날 아침 한 끼를 건너뛴다. 그러나 하루 금식은 아주 특별한 날 한다.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않는 건, 먹기 좋아하는 나로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비우는 것 중에 속을 비우게 그래도 제일 쉽다. 나에게는. 


속을 비우는 건 어느 누구와 관련 있는 게 아니고, 오롯이 나와하는 싸움이라 그나마 나은 걸까. 남에게는 못해도 내게는 인색한 나니까. 따지고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말이다. 남에게는 이목 때문에 인색하게 못하고 내게는 그러니. 아무튼 물품을 못 버리고 사람과 관계 끊기도 어려우니, 내 속이나 비워야 하나. 


사실, 속을 비우는 것도 마음 비우는 것과 관계가 있긴 하다. 먹고 싶은 욕심을 버려야 하니까. 그러고 보면 버리고 비우는 건 유기적 관계에 있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책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못 버리는 것이니까. 그리 생각하니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위안이 된다. 


어젯밤 늦게 산책을 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아파트 정원을 거니는데, 울타리 너머로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로등 불빛에 얼비친 은행잎과 단풍잎이 고왔다. 눈물이 나도록. 그러면서 든 생각들이다. 버리고 비워야 할 것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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