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Jun 20. 2023

깜빡이를 ‘깜빡’하면 안 된다

그날 깨달은 것

 

아침 일찍, 급한 일로 길을 나선 날이었다. 도로는 한산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예상한 시간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유류도 충분했다. 달리기만 하면 되리라. 급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해졌다. 가지런히 정돈된 가로수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옆으로 보이는 산은 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산이 나를 부르는 듯했다. 


가속페달을 지그시 밟았다. 그때 갑자기 오른쪽 차선에 있던 차가 내 앞으로 들어왔다. 훅. 깜빡이도 켜지 않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급해도 깜빡이를 켜지 않고 들어오다니. 그것도 순식간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제동이 잘되었기 망정이지 추돌할 뻔했다. 가슴이 서늘했다. 두근대기도 했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저 산의 녹음 짙어지는 나무들이 아니라면 험한 말이 튀어나왔을지 모른다. 그것도 제동이 걸렸다. 다행이다. 운전자에게 깜빡이 지시등은 언어나 다름없다. 운행 중에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 


내 앞에서 한참 달리던 차는 차선을 다시 바꾸어 이번에는 왼쪽 차선으로 갔다. 운전 습관일까. 영업용 택시인데, 무슨 연유로 저렇게 운전을 하나 싶었다. 좌회전할 요량으로 그랬을지도. 이해를 하려 했지만 놀라 두근대는 가슴 때문에 자꾸 부아가 났다.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결론. 깻잎 한 장 차이로 추돌을 면한 상황이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길을 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누가 주먹을 날린 격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신호에 걸려 그와 내가 나란히 섰다. 차창을 내렸다. 영업용 택시 안에 있는 운전자는 남자였다. 아무도 태우지 않고 혼자. 남자는 앞만 쳐다보았다. 경적을 울리지 않고 차창을 내린 상태로 한참 노려보았다. 남자는 요지부동이다. 이제 직진 신호가 떨어질 것 같았다. 경적을 울릴까 말까 하는 순간, 남자가 창문을 내렸다. 뭐냐는 듯 약간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끓어오르는 부아를 애써 눌렀다. “놀랐잖아요.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셔서요.”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배우를 해도 될 사람이다. 연기 천재다. 남자는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싱긋 미소까지 지었다. 조금 전의 표정과 상반돼 보였다. “그러셨어요? 미안합니다.” 남자는 목례까지 하며 사과했다. 그 말 한마디로 내 마음은 풀어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서늘한 것은 여전했지만. 


신호가 바뀌고 그도 나도 직진으로 진행했다.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왼쪽에서 달리던 그가 다시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충분히 거리를 두고 깜빡이를 켰다. 이상한 운전습관이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가 앞에서 비상등을 켰다. 고맙다는 건지, 미안하다는 건지, 그건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 비슷한 마음을 표현했으리라. 아마 가다가 생각해도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한 내게 무슨 표현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사거리에서 나는 우회전했고 그는 직진하며 헤어졌다. 그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하다. 처음에 창을 내리고 그를 봤을 때, 그는 기분 나쁜 표정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랬는데, 짧은 시간에 마음이 바뀐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기분을 바꿀 만큼 뛰어난 미모를 갖춘 사람일까. 그건 아닐 테고. 나의 웃음과 부드러운 말투 때문이었을까. 그랬든 저랬든 그도 나도 기분 나쁘지 않으니 다행이다. 


사람의 속성에 부조리한 부분이 있다. 본인이 잘못했더라도 상대방의 태도가 마뜩잖으면 자기 기분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면. 비겁하고 비상식적인 것을 알면서도.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부조리한 속성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지고, 잘잘못을 분별한다면, 갈등이 줄어들 텐데 말이다. 


목적지에 가는 동안 놀라 서늘했던 가슴은 서서히 진정되었다. 운전을 하게 될 때 한두 번씩 그 비슷한 일을 겪는다. 그래서 방어운전이 필요한 것이리라. 옆 보고, 앞 보고, 뒤 보고. 그것도 몇 대의 차량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찌 운전뿐이랴.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앞만 보고 달리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들어오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면, 놀라고 가슴 서늘해질 수 있다. 


지금 나는 흐름에 따라 진행하면서, 옆이나 뒤도 보고 멀리까지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할 때인 듯하다. 젊을 때는 무조건 달리기만 했으니. 이젠 내게 형성된 지혜와 연륜으로 조금은 여유롭게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나 아쉽게도 그만큼의 역량이 되지 못하는 듯하여,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그날 나의 태도는 솔직히 약간 마음에 든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내 앞으로 훅 들어왔던 그에게 화내지 않은 것이. 잘 참았다.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 남자는 일하러 아침 일찍 나왔을 텐데, 좋지 않은 소릴 들었다면 종일 기분 나빴을 거다. 물론 그의 행동은 지탄받을 만했지만. 


운전 중에는 깜빡이를 ‘깜빡’하면 안 된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도 나아갈 곳을 정한 후, 지시등을 정확하게 켜고 가야 하리라. 이제 문제가 발생하면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의 거리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문제 하나하나를 해결할 때 진지해지는 것이리라. 그것을 깨달은 날이었다, 그날은. 

이전 06화 호칭 유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