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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May 26. 2023

다슬기와 잔가시뿔고둥

문화 전반에 대한 생각


동무들과 개울 옆을 지나고 있었다. 맑은 물속에 다슬기가 보였다. 제법 굵다. 건지고 싶었다. 내가 먼저 물로 들어갔다. 금세 한 움큼 잡았다. 담을 그릇이 없다. 셔츠 앞섶을 잡아당겨 싸안았다.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더 있다. 무슨 횡재인가, 굵은 것들이다. 또 건졌다. 다른 종도 보였다. 잔가시뿔고둥이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 마을 개울에 고둥이 보이다니.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도 건졌다. 자세히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다슬기는 거의 없고 잔가시뿔고둥 천지다. 


함께 물속으로 들어왔던 동무들이 옆에 없다. 벌써 상류로 올라가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소리쳐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들리지 않는 걸까. 아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목소리가 왜 나오지 않는 걸까. 무엇보다, 우리 마을 앞개울에 왜 잔가시뿔고둥이 있는 걸까. 어디서 들어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온 개울을 잠식해 버린 걸까. 다슬기가 지천이던 개울이었는데. 큰 것, 중간 것, 작은 것, 아주 깨알만 한 것 등. 


그뿐인가. 가재 미꾸라지 모래무지 붕어까지 얼마나 많았던가. 하도 많아 멱 감을 때 물고기가 허벅지를 간질이던 것은 다반사였는데. 물고기와 가재는 보이지 않고 잔가시뿔고둥만 득시글거렸다. 이게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 남해나 서해 갯바위에 사는 생물체라는데. 아쉽다. 걱정도 된다. 우리 마을 개울에서 다슬기가 사라질 것만 같다. 다슬기가 없는 개울,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굵은 다슬기를 다시 놓아주었다. 번식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꼭 고둥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다시 소리쳐 동무들을 불렀다.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터져라 소리치다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다. 현실처럼 선명하다. 잔가시뿔고둥이 잠식해 버린 앞개울. 개울 옆 버드나무, 무성한 수초, 멀리 상류로 올라가던 동무들, 모두 영롱하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다. 장주의 꿈처럼. 아쉬운 마음만 서늘함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이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용의 골자는 잔가시뿔고둥이 개울을 잠식해 버렸다는 것이다. 겨우 한 움큼 굵은 다슬기만 남기고. 고둥은 개울에 사는 생물이 아니다. 바다의 갯바위에 산다. 그렇다면 외세를 의미하는 것일 텐데, 아무래도 그건 외세에서 온 문화가 아닐까. 그것도 문학이나 언어와 상관있는. 다슬기는 강이나 개울에 사는 생물이므로 우리 전통문화이고. 그쪽을 전공한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인다. 엉터리 꿈 해석은 생각을 비약시킨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 해도, 매개가 되는 언어까지, 외국어로서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것 역시 현실을 반영하는 거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거슬린다. 글 쓰는 사람은 우리말과 글을 잘 사용하고 보존할 사명이 있다고 본다. 말과 글에는 우리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으므로. 아무리 사회구성원들이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더라도, 글로 표현할 경우 순화어 내지 어법에 맞는 말을 써야 하지 않을까. 부득이할 때 외엔. 


언어는 사회구성원이 의사소통하고 생활하는 데 사용되는 중요한 도구이다. 무분별한 외국어의 사용은 언어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의 질서도 무너진다. 질서가 무너진 사회는 문란한 사회이다. 부득이하게 어떤 의미를 표현할 적확한 단어가 우리말에 없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엔 외래어로 자리하게 된다. 외래어를 쓰는 것도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쓸진대,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은 옳지 않다. 아무리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풍조라 해도. 


이러다 꼰대소리 듣는 것 아닐까. 우리가 갖는 우리말과 글에 대한 자존심이고 자긍심인데. 밀물처럼 들어오는 외세의 다양한 물결을 막을 수 없다. 막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다 우리 것은 소멸하고 국적불명의 문화만 남게 될까 두렵다. 심상치 않은 현실이 걱정될 뿐이다. 문화의 하위 범주인 말과 글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다. 기우라면 차라리 낫겠다. 


개울을 우리 사회로, 다슬기를 우리 문화로, 잔가시뿔고둥을 외래문화로 꿈 해석을 했다.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갑자기 이런 꿈을 꾼 이유가 뭘까. 꿈은 잠잘 때 발생하는 심리적인 현상이며 욕망의 표출이라고도 한다. 요즘 내가 고민하는 게 그런 걸까. 무분별한 외국어의 사용뿐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문화 전반에 대한. 괜찮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지난밤에 마지막으로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그건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곤룡포를 입은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는 ‘신토불이’였다. 그 노래 가사가 잔영처럼 남아, 나의 꿈 세계를 그렇게 그렸던 것일까. 평소에 생각했던 것이 투영되어 그런 이야기 형태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계시를 담고 있는 ‘영몽(靈夢)’이 아니고, 생각한 것이 꿈에 나타난 ‘사몽(思夢)’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심오한 무엇을 담고 있는 것 아닌가 고민하며 꿈 해석까지 해봤는데. 


아, 영몽이든 사몽이든 괜찮다. 사몽을 중심으로 이렇게 글 한 편 지었으니. 시답잖은 글이지만. 여전히 다슬기와 잔가시뿔고둥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댄다. 그러면 영몽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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