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May 22. 2023

우리의 결혼문화, 어떻게 봐야 할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제자 ‘미’가 찾아왔다. 결혼소식을 안고. 칠월에 결혼한단다. 보라색 스타치스와 안개꽃을 한 무더기 건네며 씩 웃었다. 예쁘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 웨이브 있는 긴 머리. 청바지와 연노랑 셔츠가 청순미를 더해주었다. 성실하게 공부하던 모습이 어제인 듯 떠올랐다. 안아주었다. 축하한다며. 청첩장을 받았다. 기분이 묘하다. 기쁘면서 벅차다고 할까. 내 자식 결혼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다. 


꽃다발을 건네는 ‘미’는 점심 식사를 대접하겠단다. 미의 어머니도 동행했다. 어머니는 도서관 문화교실 회원으로 십 년 이상 내 강의를 들었다. 결국 어머니와 딸이 내 수업을 들은 셈이다. 미는 대학에 입학해서 사귄 친구와 7년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단다. 미의 어머니로부터 한 사람과 그렇게 길게 사귀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다. 평소 성격처럼 무던한 미다. 그 무던함과 진솔함은 어머니를 닮았다. 


식사 후 카페에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짙어져 가는 산자락처럼 미는 벌써 어른이었다. 나이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게. 그래서 결혼할 수 있는 것 같다. 서른 살을 앞두고 있는 미, 요즘 분위기로 본다면 조금 이른 감 있는 결혼이다. 미의 어머니는 자기도 결혼을 일찍 했다며, 굳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늦게 할 필요 없단다. 사돈댁의 경제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사윗감의 성품과 미에 대한 사랑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어머니다. 


우리 아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게 가장 중요한 이유겠지만. 내가 조금 조력해 줄 테니 웬만하면 결혼하라고 해도 아들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결혼이 싫은 것 같진 않다.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추지 못했다는 게, 이유인 듯하다. 충분하게 조력할 수 없는 현실에 내가 왜 자괴감이 들까. 미의 어머니 의식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을, 여자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단칸방 하나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나의 무모함을 잊지 않고 있는 나인데. 그럼에도 우리 딸이 결혼할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지지 않았던 것은 내 성정 때문이었을까. 혼기를 넘긴 상황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딸은 잘살고 있다. 잘 산다는 의미는 둘이 성실하게 산다는 거다. 육아와 살림 게다가 직장생활까지 하며 종종 나에게 sos를 치는 딸이지만. 행복은 꼭 경제적인 것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결혼 문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완벽하게 갖춘 결혼이 아니라, 둘이 함께 사랑으로 가꾸어 가야 하는 것으로. 그렇다면, ‘오래된 미래’라는 과거에 가졌던 결혼 의식으로, 사랑 하나로 결혼을 감행하던 그 무모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어떤 조건보다 사랑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는 것은 신성한 결혼에 맞지 않다. ‘사랑’과 ‘건강한 심신’을 가졌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지금 시대에 이런 무모함을 용납할 부모 많지 않겠지만.  


물론 부모가 여유 있다면 얼마든지 조력할 수 있다고 본다. 자식을 위해 절약하며 살아왔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자녀 결혼에 지나치도록 조력해야 하는 문화, 맞지 않다. 오죽하면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라는 말이 생겼을까. 형편대로 하는 게 맞다. 형편대로라는 말은 나처럼 경제력 없는 부모가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 아들이 결혼을 못하는 것인지도. 


가끔 생각한다. 자녀의 결혼에 조력할 수 없는 나의 경제력을. 성실히 살지 못한 것 아니고, 낭비를 한 적도 없으며, 평생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일해 온 나인데, 아들딸에게 몇 억짜리 전세나 집을 해줄 수 없다. 내 노후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으나 아들이 결혼한다면 아들도 나도 집 문제를 해결할 여력이 못된다. 예전의 문간방이나 단칸방에 해당되는 오피스텔이라면 몰라도. 솔직히 오피스텔에서 신혼을 시작한다고 하면 누가 딸을 시집보내겠는가. 당사자도 물론이고. 


우리 아들 같은 입장에 놓인 젊은이가 한두 사람일까. 정부에서 행복주택이니 신혼부부 주택이니 갖가지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만족할 만한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를 나는 대략 알고 있다. 의식의 문제다. 결혼에 대한. 그것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자본을 쏟아붓고 정책을 내놓아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결혼하지 않으니 출생률도 떨어진다. 결국엔 국가의 존폐여부를 걱정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 아닌가.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자초한 결과라고 본다. 신성한 결혼에 배금주의가 깊이 스며들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결과다. 더 어렵고 힘들던 시절에도 결혼하고 아기 낳아 키우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현재의 상황도 만만치 않지만 먹고사는 것까지 위협받고 있는 형편은 아니다. 의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와 함께 편리주의 또 배금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의 결과는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국가의 존폐여부를 우려할 정도로. 그래, 국가가 존재하거나 말거나 내가 할 걱정 아니다. 내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모든 게 쓸데없는 걱정이리라. 


이제 결혼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미디어에서도 너무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직장에서도 결혼이나 자녀 출생으로 인한 불이익이 있으면 안 된다. 장려하는 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 지독한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도 잠재워야 한다. 아, 그러려면 우리의 의식이 참으로 성숙해야 하는데. 지금은 손해 보거나 희생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는 세상이니, 어려운 일이다. 남에게는 그것을 요구해도, 본인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쉽지 않다. 우리 사회가 경쟁사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경쟁이 아닌 게 없으니.


이렇든 저렇든 조금씩이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의 삶을 당당하게 산다면 가능한 일인데. 우리 아들의 의식부터 변하면, 아니, 미나 미의 어머니 같은 의식을 가진 처가를 만난다면, 결혼할 수 있을까. 지금 세상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들 결혼은 더 늦어지고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결혼은 선택이라고 한다. 그게 남의 자식에게는 해당돼도, 내 자식의 문제로 보면 너그러울 수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미가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 결심을 한 것은 착해서란다. 얼마나 순수한가. 착하다는 것 하나로 결혼할 수 있는 그 남자친구는 복이 넝쿨 채 굴러들어 왔다. 그렇지 않은가. 미는 착한 것뿐 아니라 어머니를 닮아 지혜롭고 심신이 건강한 사람이므로. 게다가 자기 일을 잘할 수 있는 성실함까지 있잖은가. 건강한 젊은이, 내 제자 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안아주었다. 


우리 아들도 미와 같은 여성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착한 아들이므로. 어미니까 그렇게 보는 거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이전 09화 재개발, 동전의 양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