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잠든 듯 보였던 산이 깨어났다. 앞산 속에 어른어른 진달래가 보였다. 몽글몽글 연녹색으로 피어나는 산을 보며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뿐이었다. 금세 바쁜 일정에 쫓겨 하루가 어떻게 가고 봄이 언제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몰랐다. 근처에 사는 친구가 전화해서 말했다. 이게 뭐야, 가까워도 만나지도 못하네. 그랬다. 하루하루 앞에 있는 일을 해결하느라 겨를이 없었다.
그런 중에 분양받은 텃밭에 무엇을 심고 가꾸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텃밭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바쁜 중에 짓고 있는 텃밭 농사니 소일거리라고 할 순 없고 신체활동을 시켜주는 운동도구다. 텃밭이 운동도구라고 하니 우습긴 하지만 사실이다. 오고 가고 움직이는 거리가 6km 가까이 되어 만보쯤 된다. 차량 이용해서 가도 되지만 웬만하면 걸어서 가고 온다.
상추 모종 심고 다양한 씨앗 심고 어제는 부추와 파 강낭콩까지 심었다. 종류가 10여 종 넘는다. 농사와 자식은 욕심대로 되는 게 아닌 줄을 알면서 이 무슨 욕심인가. 많은 양은 아니나 종류는 다양하다. 더 심을 게 있는데 고추와 가지다. 그 자리만 남겨놓고 우리 텃밭엔 다 심었다. 아직 손도 안 댄 곳이 몇 보이고, 빼곡하게 심은 곳도 있으며, 상추 몇 포기만 심고 그냥 있는 곳도 있다. 남의 텃밭을 엿보는 것도 재미있다. 심은 걸 보면 주인의 마음이 엿보여서.
엊그제는 우리 텃밭에서 칼로 도린 듯 깨끗하게 상추 모종이 잘라진 걸 보았다. 깜짝 놀랐다. 관리자에게 물으니 고라니 짓이란다. 안 그래도 공포를 가끔 쏘면서 관리하고 밤이면 문을 닫는데도 울타리 너머 들어간 듯하다고. 이런! 농가에서 야속해하는 고라니 짓을 내 작은 텃밭에서 경험하다니. 평소엔 귀엽게만 보였던 고라니가 얄미워지는 순간이었다. 할 수 없이 상추 모종을 더 사다 심었다.
전에 천변 산책할 때 마을 뒷산에 살고 있는 고라니가 나타나 한참 쳐다본 적이 있다. 사슴처럼 귀가 쫑긋하게 생긴 녀석이 겅중겅중 뛰어 개울 건너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정신 놓고 보았다. 장마철에는 물이 불어 건너가지 못하고 왝 왝 울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안아서 물 건너로 보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식구와 친구가 있는 뒷산 숲 속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 텃밭의 상추를 고갱이까지 싹둑 잘라먹은 고라니가 그 녀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한 포기만 잘라먹은 걸 보면, 그 귀여운 녀석일지도 모른다. 전에 보낸 내 애정의 눈빛을 기억하고 아차 싶어 한 포기만 먹었는지도. 어쩌면 자기가 우리 텃밭에 왔다 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한 장난일지도 모른다. 맞다, 그게 맞다. 안 그러면 어떻게 두 포기도 아니고 한 포기만 잘라먹을 수 있을까. 너였다면, 네가 배고팠다면, 두 포기 아니 다섯 포기까지 잘라먹었어도 나는 용서할 수 있는데.
생각하다 보니 그 녀석이 갑자기 다시 귀여워졌다. 변덕이 오뉴월 팥죽 끓듯 한다더니, 찰나에 바뀌고 또 바뀌는 마음. 한 포기 가지고 얄미운 마음이 드는 밴댕이 속같이 좁은 속이라니. 내가 아는 녀석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다섯 포기를 잘라먹어도 용서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안면이 중요하다. 알면 용서하고 그렇지 않으면 한 포기도 얄미워지는 변덕스러운 마음의 소유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 실소가 나왔다.
상추모종 한 포기에 어느 농가의 밭을 온통 망가뜨린 고라니로 확대되었는데, 내가 아는 고라니로 생각되는 순간 다 용서되는 것에서 현대 사회의 관계를 떠올린 건 비약일까. 층간소음의 문제로 불편과 갈등을 넘어 칼부림까지 일어나는 현실에서, 서로 안면이 있는 관계 그보다 서로 잘 아는 이웃의 관계로 발전된다면, 적어도 극단적인 단계까지 가지 않을 것 같다. 이웃 간의 정으로 서로 이해하고 갈등을 해소하며 더불어 사는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상추모종을 고라니 덕분에 몇 포기 더 심었다. 혹시 또 고라니가 잘라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도 먹고, 나도 먹고, 벌레도 먹고, 서로 나눠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찮아졌다. 이웃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고 사촌보다 가까운 관계라고 보고 싶다. 상추가 자라면 이웃과 나눠 먹으리라. 날마다 자라는 상추를 보며 기대되는 일이다.
오늘은 앞산이 더욱 푸르러졌다. 진달래가 아직 울긋불긋 보인다. 저 앞산과 뒷산 어디에 있던 고라니가 가끔 먹이를 찾아서든 사람을 찾아서든 내려오는 우리 마을, 고향의 향취를 느끼게 하는 이곳이 정겹다. 또 바쁜 일상 속에서 자투리 같은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사는 재미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