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한 통

by 최명숙


이번엔 김장을 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지 못했다. 때깔 좋은 고춧가루와 알싸한 마늘까지 사놓고 김장할 날을 계획해 보았는데, 일이 갑자기 바빠지는 바람에 끝내 못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고춧가루를 야무지게 꽁꽁 묶어 냉동실에 두고, 마늘도 김치냉장고에 넣어두고 고기 구울 때마다 한 통씩 까서 먹고 있다. 동생이 무청김치를 주었기 때문에 김장을 꼭 해야겠다는 마음이 가셨다. 설 때쯤 알배기 겉절이 하고 무 납작납작 썰어 나박김치나 담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가끔 김장 김치 쭉쭉 찢어 뽀얀 쌀밥에 얹어 먹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지만 전에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랬다. 또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추김치를 하면 되리라, 정 그럴 수 없으면 유명하고 맛있다는 **김치를 사 먹으면 되리라. 지금까지 김치를 숱하게 먹고살았으면서 밥상에 앉으면 왜 그게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반찬이 이것저것 있어도 김장 김치 한 포기 꺼내 대가리 뚝 잘라 쭉쭉 찢어 갓 지은 밥에 얹어먹으면, 세상 다른 반찬은 소용없는데 싶었다.


그래도 어쩌랴, 없는 걸. 견디다 못해 묵은지를 꺼내 놓으니 이건 아니다. 아삭하면서 알맞게 익는 김장김치가 이렇게 그리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언제나 풍족하게 먹었던 김치가 아니던가. 왜 김장을 안 해서 이런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지 발등을 찍고 싶었다. 애써 최면도 걸었다. 언제든 먹고 싶으면 담그면 될 일인데, 뭐.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랬다.


해마다 여동생과 김장을 같이 했다. 이번에 김장을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동생네 집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편찮으신 시어머님을 동생이 모시게 되었는데, 그 바람에 시누이들과 같이 김장을 하게 되었다. 친정 식구인 나는 뒤로 쑥 빠졌다. 안타까워하는 동생에게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이 나이 먹도록 그거 하나 못하겠느냐고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동생이 무청김치만 한 통 주고 배추김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이다. 내가 김장에 참여하지 못했어도 기꺼이 한 통쯤이야 주고도 남을 동생인데.


무청김치를 다 먹었고 여름에 담근 오이지까지 다 먹었는데 김치 담글 여력이 없다. 내가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김치 없이 밥 못 먹는 사람으로 말이다. 공연히 투덜투덜 대다가 팔을 걷어 부치기로 했다. 하겠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 마음먹는 게 어렵지 시작하면 그깟 것 일도 아니다. 더구나 종갓집 종손녀이고 맏며느리로 갈고닦은 실력과 저력이 있는데. 마음을 먹고 나니 계획이 저절로 세워졌다.


첫째, 오후 강의 마치고 귀가하면서 장을 본다. 둘째, 오자마자 배추를 씻어 소금을 적당히 쳐서 절인다. 셋째, 절여지는 동안 양념을 준비한다. 넷째, 야간 강의 끝나자마자 바로 들어와 김치를 버무린다. 벌써 다 했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심란해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말로 떡을 하면 조선 사람이 다 먹고도 남는다고 했던가. 말이야 쉽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또 아니다. 계획을 세우는데 이랬다 저랬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사이에 오후 강의 시간이 다가와 차에 시동을 걸고 달렸다. 핸즈프리로 전화를 걸었다. 자매처럼 가까이 지내는 동네 언니다. 언니와 대화 중에 김장을 안 해서 겉절이와 나박김치나 좀 담글 생각이고 수업 마친 후 장을 볼 예정이라고 했다. 제법 주부 같은 대화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는데, 강의실에 도착하니 연락 달라는 문자가 언니로부터 와 있었다.


“왜요? 언니!” 김장 김치 한 통 줄 테니 하지 말란다. 알맞게 익었는데 맛도 괜찮은 것 같단다. “아니에요, 식구도 많은데 저에게 줄 게 어디 있겠어요. 겉절이 하면 돼요.” 속으론 쾌재를 부르면서도 사양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언니 음식솜씨를 잘 아는 나로선 마다할 일이 전혀 없다. 눈앞에는 벌써 김장김치 쭉쭉 찢어 하얀 밥에 올려 먹는 장면이 오락가락했다. 이미 한 통 가지고 내려왔으니 수업 마치고 통화하잔다. 언니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을 거라며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단다.


수업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에 만난 언니는 그 맛있는 김장김치 한 통을 내 차에 실어주었다. 집에 오자마자 김치 한 포기 꺼내 쭉쭉 찢어 데운 밥 위에 얹어 먹었다. 세상천지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을까.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손 크고 통 큰 언니의 그 손과 마음만큼이나 큰 김치 통이,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 들어앉았다. 봄 되어 새 김치 할 때까지 충분히 먹을 양이다. 맛이야 두말할 것 없다. 믿고 먹는 언니의 음식 맛 아니던가.


사랑의 빚 외에는 남에게 빚지지 말라고 했다. 그래, 이건 사랑의 빚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많이 지면서 살았다. 동생에게도 숱하게 밑반찬과 김치를 얻어먹었다. 물질적인 빚은 없지만 사랑의 빚은 여기저기 많이 졌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리라. 꼭 당사자가 아니라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리라. 김치 한 통, 귀하고, 맛있고, 많은 깨달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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