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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22. 2022

못됐어! 못됐어!

아이는 잘못이 없다


“모때써! 모때써!”

네 살짜리 아이가 놀이터에서 계속 외쳤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그랬다. 눈을 부릅뜨고 야무지게 내뱉는 말에 감정이 실렸다는 게 놀라웠다. 그것도 네 살짜리 아기가 아닌가. 자기가 타려는 시소에 다른 아이가 앉아 있으면 쫓아가서 밀며, 그 말을 외쳤다. 미끄럼틀에 올라가는 다른 아이에게도. 자기보다 크거나 작거나 상관없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아이는 남아였다. 눈이 또렷하고 이마가 훤한 것이 잘생겼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곱지 않았다.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못됐다고 외치며, 어떤 놀이기구든 아무도 못 올라가게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네 살짜리 아이들과 무척 달랐다. 네 살밖에 안 된 저 아이가 왜 그럴까.


한동안 나도 어린이집을 운영했다. 그 보육현장을 떠올리면 미소가 먼저 번진다. 그때는 시절이 달라서 그랬을까. 힘들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 덕분에 매일 행복하고 즐거웠다. 소리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원아들이 간혹 있었지만 금세 얌전해지곤 했다. 아이들의 행동을 통제한 적이 거의 없다. 약간 떨어져 아이들을 관찰하는 정도였다. 교사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질서 유지가 되었다. 


사고나 충돌이라고 해야, 아이들이 밀거나 물거나 놀이기구에서 다투는 정도다. 하지만 조금만 개입해서 설명하며 사이좋게 놀라고 하면 금세 잘 놀았다. 그런 모습이 신통하고 예뻐서 아이들을 더 사랑했던 것 같다. 싸움은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가는 거니까. 그것이 위험하게 전개되지만 않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영유아들은 싸웠다가도 금세 풀어져 같이 노는 게 보통이다. 


그런 모습만 알고 있는 내게 놀이터에서 본 아이의 행동은 인상적이었다. 한동안 관찰했다. 외손자 온이는 다섯 살이다. 내가 가면 놀이터에서 같이 노는 걸 좋아해, 늘 한 번씩 나가곤 한다. 예전 추억도 새록새록 떠올라 나 역시 즐거운 시간이다. 그날도 온이와 함께 놀이터에 나갔다가 목격한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야무져서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하게 보았는데, 모든 아이들에게 못됐다고 계속 소리치며 때리는 시늉을 해서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 아이 엄마에게 문제가 있는 듯했다. 아이 아빠는 아이가 소리치고 다른 아이들을 밀 때마다 제재를 했는데, 아이 엄마는 그게 아니었다. 자기 아이가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고, 심지어 다른 아이들에게 양보를 요구했다. 요구하는 건 벌써 양보가 아니다. 강요다. 


“너희들 미끄럼틀에 이 애기 먼저 올라가게 해 줘. 얘는 아기잖아. 니들은 형이고.”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말이 먹힐까. 아니다. 빤히 아이 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질서를 지켜야죠. 우리도 기다린 거예요.”


그럴 때마다 네 살짜리 아이는 짜증을 내며 못됐다고 외쳤다. 아이 엄마는 자기 아이가 납득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아니었다.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아이들에게 자꾸 아기니까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그때 확실히 들었다. 아이 엄마의 중얼거리는 말끝에, 너희들 참 못됐다,라고 하는 것을. 


끼어들고 싶었다. 그럴 뻔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닌 듯해서다. 공연히 말씨름이라도 하게 되면, 이 나이에 남우세스러운 것 아닌가. 주 양육자가 엄마인 듯한데, 그 엄마가 평소에 자주 쓰는 단어가 그 말인 것 같았다. 네 살짜리 아이가 잘못해봐야 얼마나 한다고 ‘못됐다’는 말을 했을까. 


아이들은 부모의 언행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 어려운 것이다. 알게 모르게 배워가니까. 고운 말과 순한 말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타인과 소통하면서 가장 중요한 게 말이다. 크고 작은 갈등 대부분이 말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가. 관계가 개선되는 것에도 말이 영향을 미친다.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혹시 온이가 그 말을 배우게 될까 저어되었다.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노란 금잔화가 가을 오후 햇살을 받고 있었다.

“꽃이다, 꽃.”

온이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그 꽃보다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이들 아닌가. 

“그래, 꽃이네. 이 꽃 이름은 금잔화야.”

금잔화, 금잔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이의 작은 입에서 꽃 이름이 흘러나왔다. 


우리 뒤에 대고 그 아이는 여전히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우리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모든 것을 보고 그렇게 외치는 것인지도. 갑자기 그 아이가 가여워졌다. 네 살짜리가 무엇을 알겠는가. 자주 들었던 그 말을 배워서 하는 것뿐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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