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아! 있잖아... 그... 호캉스 말고, 원래 단어가 뭐더라?
바캉스라는 단어조차 낯설어졌다. 사람들은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새벽 냄새를 맡으며 멀리 떠나는 대신, 서울 도심 한복판으로 휴가를 떠난다. 동료는 회사 바로 긴 건너 건물에 새로 생긴 호텔에 3박 4일 여름휴가를 '떠났다'.
바캉스, 피서나 휴양을 위한 휴가라는 뜻이다. 라틴어 Vacatio에서 기원한 말인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유래를 찾아보니, 이상하게만 느껴졌던 '호캉스'라는 단어가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호텔 방문을 열고 '따라 다라 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어떤 음식이 또 썩어 있을까 냉장고 문을 살짝 열어보는 두려움으로부터, 린넨 셔츠보다 더 허물 거리는 몸을 이끌고 옷과 가방 등을 제자리에 걸어둬야 하는 귀찮음으로부터. 밤새 흐른 땀으로 새하얀 침대 시트의 가운데 부분이 누리 끼끼 해지는 과정을 목격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먼지 가득한 외출복을 입은 채 눈보다 새하얀 시트 위에 '하! 좋다!' 하고 몸을 내던질 수도 있다. 플렉스를 하다 하다, 먼지와 더러움까지 플렉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호텔방에서의 플렉스가, 내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호텔방 안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던 것들은, 그 방을 나서는 순간 내 삶을 오히려 망쳐놓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올여름 호캉스를 떠난 적 있다. 호텔 방문에 카드키를 대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문과 마주 보고 있던 건너편 벽면의 커튼이 자동으로 열리며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재즈 음악도 자동으로 재생됐다. 전기와 에너지가 깜짝 준비한 이벤트에 얼떨떨했던 나는, 그제야 문을 닫으려 현관문 안쪽 손잡이를 잡았다. 정말 오뉴월에 서리라도 내린 걸까? 8월 여름날, 손잡이는 얼음장처럼 차디 찼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호텔을 찾은 손님을 위해, 에어컨은 언제부터 열심히 엔진을 돌리고 있었던 걸까.
오늘날 선진국 중산층 가정의 소비 수준은 중세시대 귀족의 생활수준과 맞먹는다고 한다. 당시에는 수십, 수백 명의 하인을 부렸다면서 호사를 누렸다면, 이제는 자원과 자연, 에너지를 마음껏 착취하고 이용하며 같은 호사를 누리고 있으리라. (그 착취의 굴레 아래 여전히 사람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나, 이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호텔에서는 일회용품과 에너지, 전기, 인력을 아낌없이 착취하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린다. 먼지 뭍은 이불보와 커피 머신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밖에 내다둘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이 신성한 호탈방 안에는 단 하루도 머물지 못하게 쫓겨 나리라.
예쁜 모양으로 접혀 있는 호텔 화장실의 휴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호텔은 정녕, 나의 위장과 창자의 활발한 화학작용의 결과이자 인간이 숙명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쓰레기를 탄생시키는 순간까지도, 아름답게 치장해주고 싶었던 걸까.
호텔 프론트에 "분리배출 따로 안 해도 되나요?"라고 '촌스러운' 질문을 한 적 있다. "걱정 마세요. 그런 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요."라는 답변에 나는 눈으로는 웃었으나, 차마 전하지 못하는 말은 마스크 안을 맴돌았다. 호캉스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까봐 걱정돼요. 내가 내 돈 내고 일회용품 사고, 전기 팡팡 쓰겠다는데, 그럴 권리 있는 거 아니야? 라고 할까봐요.
호텔방 TV를 켜니, 각 나라의 뉴스가 흘러나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자꾸만 들어서일까. 이 공간은 어쩐지 지구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