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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Feb 24. 2022

2022년 2월 22일 2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초등학교 운동장, 18년 전의 약속

옛날부터 언니는, 2022년 2월 22일이 되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6학년 동창들을 만나기로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당시에는 2022년이 오긴 올까? 우리 그때는 뭐하고 있을까? 하며 마치 절대 오지 않을 미래처럼 여기곤 했다.


딱 이틀 전, 언니가 잠들기 전에 말했다. 내일모레면 진짜 2022년 2월 22일이네. 가봤자 아무도 없을 텐데 안 가는 게 맞겠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무조건 가야지. 내가 같이 가줄게. 아무도 없더라도 그냥 가자. 우리 후회하지 말자. 그렇게 갑자기 휴가를 내고 꼬박 15년 만에 고향 익산으로 향했다.


기차에서 내려 점심을 서둘러 먹고 행여나 늦을세라 부지런히 학교로 향했다. 가는 길목마다 추억이 너울거렸지만 18년 전의 누군가와 길이 엇갈려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2시가 지났지만 역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유난히 작아 보이는 텅 빈 운동장 구석에서 언니와 나는 그네를 탔다. 에이, 그럼 그렇지. 누가 오겠어. 그래도 이렇게 와 보니까 좋네. 


2시가 조금 지났을 때, 우리 또래로 보이는 한 사람이 운동장 구석에 나타났다. 뭐지? 언니 동창 아니야? 당근인가? 하면서 쭈뼛쭈뼛 주위만 한참 맴돌았다.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나는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멀리 숨어 있었고, 언니는 어색하게 운동장을 산책하는 척하다가 그 분과 점점 가까워졌다. 그분은 2월 22일 2시의 만남을 기억하고 나온 언니의 동창이었다. 


긴긴 시간이 엉켜 있을 마음, 그 한 켠에 18년 전 약속에게 오래도록 자리를 내어준 그 마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마스크가 젖도록 펑펑 울었다. 그 자리에서도, 카페로 자리를 옮겨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얘길 나눌 때도, 둘이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용인에서 조퇴를 하고 갑자기 내려온 당시 담임 선생님이 카페로 들어오실 때도 자꾸 눈물이 났다.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영화 속에라도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는 이 현실이 자꾸만 꿈만 같았다.


카페로 이동하려 언니 친구 차에 탔을 때, 뒷자리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누가 올진 모르겠지만 혹시 온다면 주고 싶어 오는 길에 사 온 거라고 했다. 


2022년 2월 22일 2시, 18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마냥 기다렸고, 또 누군가가 나타났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그날 오후.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그날의 감정은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되어 내 가슴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불 같기도 했다. 자꾸만 뜨겁게 몽글거린다. 18년 만에 학교 운동장을 갈 채비를 하며 꽃집에 들렀을 그 마음을 감히 가늠하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아마 이 불은, 어디인지 모를 내 가슴 속 어딘가에 자리잡아 은은하게 타면서 내 삶을 좀 따뜻하게 만들어줄 것만 같다. 타닥타닥 타면서, 흩어져 있던 삶의 조각을 찾아보자고 자꾸만 이야기할 것 같다. 또다시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보자고. 그냥 그렇게 한번만 해보자고. 


2022년 2월 22일, 기적은 이미 일어났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며, 나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언니에게 몇 번이고 재회의 순간을 물었다. 언니는 '동창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반, '진짜로 누군가 나온 걸까' 하는 설렘 반으로 걸음을 주춤했다고 했다. 한 걸음씩 가까워지며 서로 얼굴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을 때, 언니의 동창은 마스크를 낀 언니를 보고 단번에 "하연아" 하고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너 103동 1층 살았지? 나 놀러 간 적 있었어. 마치 18년 전이 아니라 며칠 전이라는 듯이, 그렇게 둘은 손을 맞잡고 한참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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