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장마다. 또 우산을 판다.
한쪽 살이 고장 나 덜렁거리는 3단 접이식 빨간 우산이 있다. 손잡이 부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찐득한 무언가가 붙어, 씻어내도 벗겨내도 갉아내도 그 점성이 도무지 떨어지지가 않는다. 급한 대로 주머니에 있던 휴지 한쪽을 얇게 반겹씩 갈라 손잡이에 붙였는데, 그게 딱 달라붙어버렸다. 비를 맞아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이니, 이쯤 되면 손잡이에 강력 본드가 묻었던 것 아닌가 싶다.
어쨌든 흰색 휴지가 감싸주었으니 손잡이를 잡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는데, 여기에 손때가 묻기 시작하면서 다소 끔찍한 비주얼이 연출됐다. 물건이 피부병에 걸릴 수 있을까? 내 우산 손잡이를 본다면 가능하다고 느낄 것이다. 마치 곰팡이라도 핀 것처럼 손잡이가 영 볼품없게 돼 버렸다. '그래봤자 내 손 때겠거니' 하고 거리낌 없이 들고 다녔는데, 우산을 보는 사람마다 '우산이 왜 이래?'하고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사실 이 빨간 우산은 내 것이 아니었다. 처음 내 손에 들어왔을 때부터 우산살 하나가 접혀 대롱대롱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커녕 구름 한 점도 없이 아주 맑은 날, 빽빽하게 들어찬 꽝꽝나무 사이에 처박혀 있던 빨간 우산이 눈에 띄어 주워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래서 버렸구나! 하고 우산살을 살피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막는 데는 어려움이 없어 보여 그 후로 쭉 쓰고 있다. 우산살이 부러진 쪽을 앞쪽으로 돌리고 우산 자체를 앞쪽으로 기울이면 거의 체감하지 못할 정도였다.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아이고, 우산 좀 새로 사라'라는 핀잔을 들을 때뿐이었다.
내게 고장 난 우산이 빨간 우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이 잔뜩 녹슬어 펼치고 닫을 때 슬로우 효과라도 걸린 듯 느리고 부드럽게 펼쳐지는 투명 우산도 있다. 이 우산은 우리집에 놀러 왔던 친구가 두고 간 것으로 기억한다. "아, 비 안 오는데 귀찮다. 그냥 안 가져갈래. 너 써!" 난데없이 낯선 집에 버려진 투명우산과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됐다. 꽤나 오래 쓰다 보니 살에 녹이 슬었는데, 닦아내고 나니 제법 깨끗한 새 우산이 됐고 그 후로도 쭉 쓰고 있다. 친구에게 나중에라도 와서 가져가라고 했으나, 몇 년째 우리 집에 눌러살게 됐다. 우산을 접은 후 재빨리 끈으로 묶지 않으면 마술사가 쓰는 마법 지팡이처럼 제 맘대로 확 펼쳐지는 보라색 우산도 있다. 이 보라색 우산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회 수련회에 갔을 때도 쓴 기억이 있으니, 벌써 10년도 더 오래됐다. 묶어두기만 하면 문제가 없어서, 그냥저냥 잘 쓰고 있다.
그렇다. 고장 난 우산을 쓰는 여자, 바로 나다. 나도 고장 난 우산이 좋아서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살이 하나 부러졌다는 이유로, 녹이 좀 슬었다는 이유로 특히 귀찮다는 이유로 우산을 홀대하기에는, 비닐과 철이 정교하고 섬세하게 엮인 우산이 참 아깝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집계하기도 어려운 '버려진 우산 수'를 얼추 추산해 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만 버려지는 우산 쓰레기가 연간 1억 개 이상이라는 통계와 이들이 280만 톤에 이르는 유해가스를 배출한다는 기사가 어른거리는 탓도 있었다.
서울 강남 한복판이 침수되고 물막이판이며 빗물터널이며 이렇다 할 계획을 내놓은 지 1년, 그 대책들이 느적느적 진행되고 사람들이 여전히 4000원짜리 우산을 사는 사이 여름은 또다시 찾아왔다. 더위를 막아주던 라니냐가 가고, 7년 만에 슈퍼 엘니뇨가 찾아왔다. 어마어마한 더위, 예측이 어려워진 이상 기후와 폭우는 일상이 됐다.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동료들이 편의점에 들어가 비닐포장지로 싸여 있는 우산을 너도 나도 집어 들었다. "소연 씨는 안 사요?" 나는 쭈뼛거렸다. 아... 회사에 우산이 있어서요. (고장 난 우산이지만요.)
머리를 가리는 시늉을 하고 얼른 회사로 뛰어갔다. 내가 뛰던 이 길은, 새로 산 우산을 받고 2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회사 건물은, 작년 쏟아진 폭우로 사람이 죽었다는 서초구 강남빌딩 지하주차장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10년.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앞으로 남은 기간이라고 경고한 기간이다. 앞으로 10년 안에 '적극적인' 탄소 감축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기후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문득 궁금해진다. '적극적인' 탄소 감축 노력은 누가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일까? 귀찮다며 버리고 싸다며 다시 사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데, 기후위기를 멈추기 위한 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10년은 10년이 아니라는 사실이 꽤 명백해진다. 우리가 뭐라도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자꾸 줄어들고 있다. 불과 5년 전인 2018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발표한 시기보다 이미 10년 정도 앞당겨졌다. 과학자들은 지금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인류가 생존의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2023년 여름에도, 2024년에도 비가 오면 또다시 새 우산을 사는 사람들이 계속된다면, 빠른 성장과 발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그린'성장'을 외친다면, 10년은 5년이, 5년은 3년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우리는 이미 빙산과 충돌했다. 물이 저 아래쪽에서 차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댄스홀을 떠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뷔페 음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우리가 선택하지 않으면, 자연은 우리를 저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 <코드그린> 토머스 L. 프리드먼
4000원짜리 투명 우산이 우리가 애써 손질한 머리를 헝클어 뜨리지 못하도록 딱 그만큼만 간신히 우리 머리 위를 보호해주는 사이, 기후위기와 재난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발목, 허리,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있다.
올해도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다. 강남에 있는 회사로 향하는 출근길, 작년과 다름없이 우산을 파는 상인이 나왔다. 작년에 3000원 정도 하던 우산이 4000원까지 올라 있다. 장사가 잘 되는지 태연하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상인을 옆으로 나는 오늘도 고장 난 우산을 꺼내 든다.
우산 오래 쓰는 법
1. 우산 사용 전에 가볍게 흔들어 펼친다. 펼치기 전 2~3번 정도 가볍게 흔들어 주면, 접혀 있는 상태로 원단을 풀어주게 되어 살대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일 수 있다.
2. 사용 후에는 활짝 펴 물기를 제거하거나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다.
3. 손잡이가 아래로 향하게 세워두면 꼭지 부분에 빗물이 고여 살이 녹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혹시 우산대에 녹이 슬었다면, 아세톤으로 지울 수 있다. 좁은 틈은 면봉을 이용하자.
4. 세척은 중성세제로 하되, 너무 자주 하면 방수 기능이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자.
5. 우산살이 부러지거나 잘 펴지거나 접히지 않는 정도는, 아주 작은 수리면 금세 고칠 수 있다. 5분, 아니 3분이면 고쳐지기도 한다. 시에서 운영하는 '우산무료수리센터'가 있으니 근처의 수리센터를 이용해 보자.
- 단비우산 (고장 난 우산 기부)
우산 버리는 법 (출처 블리스고)
1. 분리하지 않을 시 - 살이 튀어나오지 않게 묶어 일반쓰레기로 버다.
2. 분리 시 - 가위나 칼을 이용해 우산 비닐과 우산대(우산살)를 분리하면 재질에 따라 분리배출, 재활용이 가능하다. 우산대에 알루미늄과 함께 유리섬유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분리과정에서 유리섬유가 손에 박힐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일상 곳곳에서 재채기 하듯 툭툭 튀어나오는 쓰레기와 지구, 기후에 대한 고민을 담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