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게손가락으로 나를 집는 당신께. 제가 더러운가요?
안녕하세요.
이사를 가기 위해 옛 물건을 정리한다며, 저와 제 친구들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까만 비닐봉지 서너 장 사 오셨지요. 그동안 다른 비닐봉지들은 그렇게 버리시더니, 그거랑은 또 어떻게 다른 거길래 새로 사 오신 건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당신은 서랍을 열어보며, 한때는 추억이었던 것들부터 비닐봉지에 넣기 시작했죠. 아실리 없겠지만요, 사연 없는 물건 없다고, 하나하나 서로 얽힌 이야기를 끌어내 보겠다며 추억을 뽐내기 바빴답니다. 그래 봤자 대부분 까만 봉투로 향했지요.
참, 이번에 처음으로 빛을 본 친구도 있었습니다. 당신이 한꺼번에 주문한 택배 박스 중에 몇몇은 상자에서 채 나오지도 못한 채 갇혀 있었어요. 어찌나 억울해하던지요. 이번에 시원하게 박스테이프를 찢어내고 빛을 본 것도 잠시, 그 친구는 바로 까만 비닐봉지 안으로 파묻혀 버려졌습니다. 까만 비닐에 눈코 입을 덮인 채, 비닐 안으로 스며드는 흐릿한 빛에 초점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매립지로 향하겠지요. 물론 재가 되어, 또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되어 평생 지구에 남겠지만, 누가 그 친구의 과거를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요. 그런 친구를 보면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게 쓰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당신이 사 온 까만 봉투는, 그렇게 순식간에 한때 당신이 그토록 탐내던 물건들, 혹은 한두 번 정도 손길을 탄 물건들로 가득 찼지요. 한때 예술 혹은 아름다움으로 여겨졌던 것들도 쌓였고요. 당신은 그런 친구들을 보고 '예쁜 쓰레기'라고 불렀었나요. 참 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봉투가 제법 차오르자, 당신은 봉투 양쪽을 잡고 우리를 꾹꾹 눌러 우리가 행여나 도망가지 않게 매듭지었지요. 후다닥 뛰어서는 현관문 밖에 살포시 내놓았고요.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문을 닫으려던 그때, 그때 바람이 불었잖아요. 우리도 모두 놀라 어어 하며 옆으로 기울어졌고요. 그때 바람이 비닐을 풀어헤쳐준 덕분에, 매듭 사이로 당신의 얼굴을 봤습니다.
왜 세상 못 볼꼴을 봤다는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시며, 아슬아슬하게 봉투 끄트머리를 잡으셨나요? 마치 만지면 어딘가에 감염이라도 될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셨는지요?
저는 그저 궁금했습니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던 우리를 내다 버리면서, 왜 우릴 쓰레기 취급하셨는지.
설마 나를 쓰레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요. 애석합니다. 당신이 돈을 주고 날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난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 텐데요.
제대로 한번 빛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가는데, 저를 쓰레기라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제 인생이 너무 가여우니까요.
쓰레기 [명사]
비로 쓸어 낸 먼지나 티끌, 또는 못 쓰게 되어 내다 버릴 물건이나 내다 버린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멀쩡한 물건이 잔뜩 버려진 '쓰레기장'을 보고, 쓰레기장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멀쩡한 서랍장이 왜 쓰레기인가. 구멍 나지 않은 생수병이 왜 쓰레기인가.
우리는 ‘쓰레기’에 대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주 더럽고 비위생적이어서, 코를 틀어막고 내 눈앞에서 얼른 치워버려야 할 것 같다는, 내게 병균을 옮길 것만 같다는, 그런 오해.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쓰레기'라 불리는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벗어낸 흔적이자 허물이다. 숨 쉬는 것, 아니 돈 쓰는 만큼 나오는 게 쓰레기 아닌가. 돈이 지나간 흔적. 삶의 여정마다 따라붙는 게 족적도 이런 족적이 없다.
그런데 한 번도 쓰지 않고 버려지는, 혹은 한두 번 쓰이고 버려지는 우리의 족적에 대해서 우리는 최소한 '쓰레기'가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아닐까. 더 나아가, 이들을 버릴 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는 세금도 달리 매겨야 한다고, 이 연사 크게 외치고 싶다.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자원, 인력을 들여 물건을 만들어 팔았더니, 한 번도 쓰지 않고 버리는 꼴이라니. 자연과 인간, 자원과 노동에 대한 기만이며 모욕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