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잠정 은퇴

딱 즐거울 만큼만

by so


올해 초, 8년간의 주말부부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퇴사와 이사를 마치면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사실 한동안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 30대의 끝을 달려가고 있는 시기에, 나는 다시 20대가 된 것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참고로 과거형이다. 지금은 괜찮아졌기에 글을 쓴다.)



첫 번째 이유는 퇴사 후에 뒤늦게 밀려온 상실감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건 몇 년간의 고민과 준비 끝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고, 다시 돌아봐도 시기적으로 적절했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의 커리어가 멋져 보이고 괜스레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밤이 찾아왔다.


회사는 끊임없는 발전을 요구했고, 높이 올라갈수록 보상도 컸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컸다. 그때는 책임감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고, 스무 명의 부서원 모두의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아쉬웠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그리워한 건 회사의 일이나 직책, 높은 연봉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그리워한 건,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주는 관심과 인정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실감이 컸고, 이 감정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퇴사 후 한동안은 그냥 쉬고 싶었다. 그런데 그만둘 무렵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와 포닥을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 세상에서,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을 하지 않으면 나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 왜 증명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어려서부터 내 마음이 동해야만 움직이는 아이였다. 다행히 공부를 좋아해서 남들이 보기에는 착실한 학생이었지만, 주변에서 좋은 기회라고 아무리 권해도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안한 마음에 덜컥 포닥을 다시 시작한 게 문제였다. 이미 박사 졸업 후 회사로 진로를 바꾸며, 불확실한 실험을 끝없이 반복하는 삶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었는데.. 그동안 해 온 게 아까우니 커리어를 이어 가는 게 좋지 않겠냐는 주변의 말에 휩쓸려, 하기 싫은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이 내 우울의 두 번째 원인이었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시작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아서 너무 성급한 결정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지금은 내 삶에 여백을 두기로 했다. 행복이 뭐 별건가. 누군가가 말했듯이 좋아하는 일은 많이 하고 싫어하는 잃은 적게 하는 게 행복이니까.


학교나 직장에 나가지 않게 되며 가장 좋은 건,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들로 하루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은퇴 후 이것저것 일을 벌이다가 문득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에겐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지, 어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관심받고 싶고 기억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허영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혼자 보는 일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읽힐 것을 전제로 하는 글쓰기의 주제를 가지고 한참을 골몰했다. 어릴 적에는 추리소설을 쓰고 싶어서 공책에 쓰다 말았고, 한때는 시인이 되겠다며 어설픈 동시로 일기장을 채우기도 했었다. 그래, 그러면 일단 그때처럼 뭐라도 써보는 게 좋겠다. 이왕이면 쓰는 동안 즐겁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써보자. 쓰다가 재미 없어지면 그만두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한다.


딱 즐거울 만큼만.



이 길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가장 멋지고 즐거운 날이란 아주 인상적이거나 놀랍거나 신나는 일이 일어난 하루가 아니라,
진주를 한 알씩 실에 꿰듯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작은 기쁨이 하나씩 부드럽게 이어진 날이죠.

(빨간 머리 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