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초저녁부터 잠이 든 경식이가 깰까 조심조심 나를 붙잡고 옷을 입힌다. 저녁이면 꽤 쌀쌀해져서 어머니는 두터운 옷 자크를 끝까지 올려 채운다. 밤 기도를 가려나.
한창 어머니가 밤 기도나 철야 기도를 자주 가던 때였다. 남편 일자리를 따라 지방으로 내려온 지 3년. 먼 길 남편 따라 이곳에 왔지만 함께 지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건축일이 직업인 아버지의 댐 건설 현장이 더 촌구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잠시라도 쉴 때 부담 없이 와볼 수 있는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곁에 남편 없이 외지에서 여자 혼자 12살, 9살 아이 둘을 카우다 보니 어머니는 의지할 곳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여느 어머니들처럼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여느 어머니들처럼 남편 대신 아들에게 집착했다.
환절기면 찾아오는 비염에 병원에서 받아 온 약을 먹일 때면 잘 먹어서 기특하다며 어머니는 둘째인 아들 경식이에게는 몰래 숨겨두었던 귀한 바나나 하나를 쥐어 주었다. 말로 표현 불가한 고귀하고 달콤한 바나나 냄새는 꿀꺽꿀꺽 넘어오는 침을 참을 수 없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 약 안 먹어.
곁눈질로 어머니 눈치를 보며 엎드려 투정을 부려본다.
이놈의 가시내가. 동생 앞에서 누나가 창피하지도 않냐. 얼른 처먹지 못해.
바나나는커녕 쥐어박히기 일쑤였다.
경식이 깰라 조동아리 열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에게 괜한 엄포를 놓는다. 그니까 왜 밤 기도에 매번 나를 데리고 가냐고.
밖은 10월인데 쌀쌀했다. 산 입구에 들어서자 어둠이 집어삼킬 기세로 어머니와 나에게 입을 벌린다. 뒷산이라고는 하나 제법 큰 산이라 내가 사는 동네와는 멀어졌다. 칠흑 같은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큰 바위 밑에 다다랐다. 어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고는 그것들을 쌌던 보자기를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초, 과자 몇 가지와 사과를 놓았다.
여기가 영험한 곳이라 소문이 난 기라. 기도하는 동안 거 꼼짝 말고 앉아있거라.
초에 불을 붙이고 내가 잘 자리 잡고 앉아있나를 확인한 후 어머니의 눈이 감겼다. 불경 외는 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일렁거리는 초와 과자, 사과를 계속 번갈아 보며 주변의 어둠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때 갑자기 바위와 바닥 사이에서 뭔가가 쑥 나왔다.
엄마...
너무 놀라 어머니를 올려다보았지만 차마 어머니의 불경을 멈출 용기가 나질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커다란 쥐다.
아니, 바위와 바닥 사이에는 저렇게 커다란 쥐가 드나들 틈이 없어 보이는데...
쥐는 사과를 덥석 물고는 틈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어...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키며 또 한 번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가 금세 접고는 살그머니 일어나 그 틈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그랬더니 손이 쑥 들어가는 게 아닌가! 팔뚝이, 그다음엔 어깨가, 몸통이, 그리고 다리까지 쑥 빨려 들어갔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깜깜한 밤이었는데 이곳은 낮처럼 밝다. 눈이 부셔 잠시 눈을 비비고 살펴보니 하늘엔 분명 해가 떠 있다. 밟고 서 있는 곳엔 이름도 알 수 없는 꽃들이 만발하고 저 멀리 폭포가 분명하다. 눈앞에는 맑은 물방울들이 태양 빛을 받아 반짝반짝 무지개 빛을 내고 있었다.
길을 잃었니?
낯선 환경에 빠져 누가 있는 줄도 몰랐다. 뒤를 돌아보니 맑은 존재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사람인 듯 아닌 듯 그냥 맑은 존재.
언니얀가?
긴 머리와 웃음 띤 얼굴은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여자아이인 거 같았다. 맑다 못해 투명한 그녀를 통과해 그 뒤 꽃들이 만발한 언덕이 그대로 보였다.
길을 잃었구나.
분명 그녀 입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소리가 들린다.
혹시 지금 맑은 존재라고 생각한 내 생각도 저 언니에겐 들렸나?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저렇게 투명한데 손이 잡힐까?
잡혔다. 뭐냐 이 존재는...
그녀에게 이끌려 폭포 가까이 가니 마을이 있었고 그녀와 같은 존재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과 다른 낯선 내가 왔는데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들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그녀 집에 들어서자 온통 벽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것에 놀랐다. 한 켠 넓은 팔걸이의자엔 각각 그녀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존재가 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들은 온화한 미소로 맞아주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여 다시 책을 읽었다. 그냥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나는 벽을 향해 걸어갔고 책을 골랐다. 책도 맑았다. 글자가 분명 있는데 읽을 수 없는 묘한 글자로 되어 있었고 책을 넘길 때마다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읽어졌다. 내용은 식물들에 대한 설명들이었는데 글로 읽었다면 지루했을 내용들이 너무나 쉽고 신비롭게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이 책 저책 쉴 새 없이 읽어 들였다.
너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또 입을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말을 했다.
내가 그랬었나?
꽃 그림이 가득 그려진 예쁜 책을 골랐을 때 어머니는 그림책이나 고른다며 동생이 고른 책 보다 수준 떨어진 책이라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핀잔을 줬었다. 그 후론 책을 사러 갈 때면 이해도 되지 않는 수준 높은 책을 골라 읽지도 않고 꽂아만 두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로 못 박혔다.
그래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해.
나도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그녀를 살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부엌으로 보이는 장소로 가더니 작은 찻잔을 건넸다. 나는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주전자를 들어 내 찻잔에 기울이자 풍선껌 풍선처럼 찻잔 위로 젤리 같은 것이 볼록 놓였다. 그녀의 찻잔에도 붓자 그녀는 젤리 풍선 같은 것이 볼록 생기자 그것을 한 번에 훅 빨아들여 꿀꺽 삼켰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맛을 생각해봐.
그녀의 말에 나는 너무나 당연히 바나나 맛을 상상했다. 어머니 몰래 경식이가 쥐꼬리만큼 떼어 준 잊지 못할 귀한 맛을...
작은 찻잔의 젤리 풍선을 훅 빨아들인 순간 정말 고귀하고 달콤한 맛이 온 입안에 맴돌았다. 너무 아까워 입에 한참 물고 있다가 꿀꺽 삼켰다. 분명 작은 젤리 풍선이었는데 목을 타고 배에 이르는 순간 거짓말처럼 허기가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 후 몇 권의 책을 더 읽은 후에 걱정할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러자 곧 그녀는 나의 손을 이끌고 집을 나서 처음 만났던 장소로 데리고 갔다.
또 와도 될까?
질문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 이마에 작별 키스를 했고 나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깜깜한 어둠 속에 촛불만 일렁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도를 마쳤는지 차려놓았던 것을 조금 떼어 어둠 속으로 던지고는 나머지를 챙겨 넣고 있었다.
무슨 기도를 나보다 더 오래 허냐. 졸았냐? 그럼 그렇지. 얼른 일어나. 경식이 깨기 전에 가야지.
나는 재빨리 틈 사이로 손을 넣어보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뭐 하냐? 꿈꿨냐?
어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보따리를 챙겨 앞장서 내려간다. 나는 서두르는 어머니 뒤를 쫓아 내려가며 말했다.
엄마, 나 좋아하는 책도 많이 읽고, 바나나 맛 젤리 풍선도 먹었어.
어머니는 대답이 없다.
맞다. 어머니에게는 입으로 말해야 하는데 깜빡했다.
부모라는 것만으로 우린 자식을 내 마음대로 차별하고 억압하기도 한다.
두려움에 자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재능과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기도 한다.
부모는 온전한 사람 하나를 만들어 내야 하는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나에게 맞춤 인간이 아닌 이 세상에서 문제없이 잘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