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차나 한잔씩들 하십시다.

지원스님

by 김운용


" 산에 오는 사람들 차림이 아니니

산은 다음에 가시고 곡차나 한잔씩들 하십시다. "


스님이 김용식 일행을 산밑 음식점으로 데려가더니 여기 처사님들 곡차 한잔씩들 주시고 부침개도 몇 장 부쳐주시오 음식점 주인한테 주문을 했다.


스님은 앉지도 않고 김용식 일행을 향해 자 난 또 산으로 갑니다. 굳이 힘들다 싶으면 절깐으로들 오세요 합장을 하더니 산 쪽으로 올라갔다.




사실 김용식 일행은 한가하게 산행이나 갈 목적으로 설악산을 찾아온 건 아니었다.


현재의 상황이 못 견디게 답답했고 동료들에게 김용식이 제안해 갑자기 동해로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다들 지쳐서 더 이상 피해 다닐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어떻게든 결론을 내리자는데 묵시적 동의를 한 상태지만 막상 결행을 하자니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있어 차일피일 미루다 열흘이나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사이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인 면에서도 사정은 점점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지으면서 눈치만 살피고 있어 당사자들로서 김용식 일행은 어느때보다 더 속이 타고 답답해서 다분히 위험부담을 안은채 무작정 길을 나선 것이다.


지치고 답답한 심사라 바닷바람이나 맘껏 쏘이며 가슴 펑 뚫리게 동해안이나 한 바퀴 돌고 새로운 기분으로 환기나 하자는 생각에 딱히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그냥 동쪽으로 차키를 돌렸던 것이다.


한계령을 넘을 무렵에 앞차에 타고 가던 일행 중 제일 연장자인 이경덕이 자주 오기도 쉽지않은데 기왕 왔으니 설악산 구경이나 하자며 김용식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면서 동의도 하기 전에 방향을 설악동으로 턴하길래 김용식은

어차피 목적지를 딱히 정하지 않았으니 알아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하여간 엉뚱하기는.

이경덕의 철없는 행동에 김용식은 옆자리 김학선과 마주 보며 말없이 웃었다.




설악동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김용식 일행은 권금성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산길을 걸어가다가 우연찮게 한 스님과 같이 걷게 되었다.


김용식이 먼저 스님에게 인사를 건네자 스님은 웃으며 말을 걸었다.

" 안녕하세요."


스님은 김용식 일행들보다 연배도 훨씬 많아 보이는데도 발걸음이 가볍고 날렵했다.

트레킹 운동화를 신기는 했으나 속도도 빠르고 무엇보다 산길에서의 보폭이 안정되어 보였다.


김용식 일행과 십 년 이상의 나이차를 감안할 때 운동으로 상당히 단련된 몸놀림을 보여 속으로 감탄했다.


사실 김용식도 순간 스피드와 점프력 등 기본적인 운동신경이 아주 좋은 편이라 스님과 보조를 맞추긴 했으나 숨이 가빠왔다.




" 어디서 오신 건 알겠고 무엇하시는 분들입니까."


김용식은 우리가 어디서 왔다는 걸 어떻게 아셨느냐는 표정으로 스님을 흘낏 쳐다보았다.

어허 중이 괜히 중인 줄 아시는가 하더니 불규칙하게 놓인 계곡 돌다리를 앞서서 훌쩍훌쩍 뛰어 건너가서


" 아까 처사님들끼리 마포 여의도가 어떻고 얘기들을 하시는 걸 엿들었소이다. "


어째 눈에 띈다했더니 역시 보통 스님은 아니시구먼 김용식도 날렵한 솜씨로 삐뚤빼뚤한 돌다리를 한숨에 건너갔다.

일행들 대장이시요 묻고는 답을 들을 생각도 않은 채 일행들은 떨어져 오니까 놔두고 우리끼리 먼저 절간 구경이 하자며 앞서 걸었다.


왜 설악산이 명산이라 하는지는 설악산 품속으로 깊이 들어가 봐야 안다며 스님은


" 난 설악산 절깐만 20년요.

중놈 생활만 40년이 넘었소. "


열아홉 살에 머릴 깎았으니까 절밥을 많이 먹었는데도 밥값을 못해서 걱정 이외다라며 빙긋이 웃고는 저기가 내가 요즘 잠자고 먹고 싸고 불공드리는 임시거처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악산 신흥사라 쓰인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보였다.



일행들은 사진도 찍고 계곡에 들어가 노느라 한참 떨어져 있어 김용식은 혼자서 스님을 따라 신흥사 입구로 들어섰다.


" 스님은 소속이 없으신 겁니까? "


중놈들은 본래 소속이 하나지요. 부처님 손바닥 안에 살고 있으니 죄다 부처님 소속이지.

관세음보살.


자 절간이나 구경하다가 자고 가고 싶으면 저기 종무소 가서 재워 달라고 하고 안된다 그러면 속초나 양양 호텔 가서 자면 되지. 뭐 구차스럽게 중놈들한테 빈한 소릴해.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요. 절간 인심도. 마치 법화경을 암송이라도 하듯이 술술 하고 싶었던 속내를 다 털어놓았다.


사천왕문을 지날 때 인심이 변한 사찰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스님은 자신의 의견을 던져 김용식에게 은근히 동의를 구하려는 눈치다.


" 예. 스님 감사합니다. 일행들 한테 가봐야 해서 내려가 보겠습니다."


같이 갑시다. 이게 내 수도법입니다. 스님은 다시 앞장을 서며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였다.

회자정리 이자정회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

만날 때 헤어짐을 헤어질 때 만남을 생각하라. 꼭 다시 만나게 되는 법입니다.




일행들도 계곡에서 나와 신흥사로 올라오다가 스님과 김용식을 다시 만났다.

날도 어둡고 서둘러 속초에다 숙소를 정하자는 김용식 의견에 따라 올라오던 걸음을 돌려 설악산 입구 쪽 주차장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저녁 무렵이고 신흥사 소속은 아닐지라도 명색이 스님인데 곡기도 때우지 못하고 보내는 게 아쉬워 그래서 일부러 따라 내려와 김용식일행에게 곡차를 대접하려했던 것이다.


여보 사장님.


이분들 집은 있어도 갈 데가 마땅찮은 것 같아 내가 모시고 왔으니 곡차도 주시고 먹을 것도 적당히 챙겨주시오.


예. 스님. 주인의 공손한 태도로 봐 스님의 공덕이 한두 번이 아닌 듯해 보였다.


신흥사 쪽으로 올라가던 스님이 다시 돌아왔다. 내일은 내가 낙산사로 갑니다.

그때까지 속초에 있게 되면 낙산사로 오시오.

내 밥은 챙겨주리다. 관세음보살.


스님의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워 보인다.

하루 종일 입구에서 신흥사까지 오르내리길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그것이 내 수도법이라 했지만 인심이 변한 절간이 옛날만큼 편치 않으니 내심 스스로 불만스러운 심사를 달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숙소를 정하고 맘 편하게 한잔 하자는 김학선의 의견에 따라 김용식 일행은 속초로 이동했다.

좁은 모텔보다 널찍한 펜션으로 가자는 역시 김학선의 연이은 제안에 따라 우린 속초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 장사항 포구에서도 멀지 않은 해변가 가까운 곳에 있는 2층짜리 펜션을 숙소로 정했다. 이층 숙소로 올라가 보니 동해바다 전망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김학선이는 여행도 낚시도 자주 다니다 보니 확실히 노는 방면에 있어선 역시 빠꼼이었다.

김학선은 얼마 전 홀로 계시던 모친이 돌아가셔서 장례 치르느라 몸도 맘도 피곤했을 텐데 답답하고 침울한 오늘 하루 분위기 띄우려 애 많이 쓰는 게 엿보였다.

김학선은 마흔여덟인데 아직 총각이다.


김용식이와 김학선은 나이는 한 살 차이고 입사도 일 년 차이 나지만 그야말로 수 십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절친이자 혈맹의 동지다.




대충 짐을 풀고 편한 옷차림으로 장사 포구 포장마차 끝집에서 내다 놓은 방파제위 파라솔아래 의자로 가 자리를 잡았다. 일행이 모두 아홉명이라 두 개의 파라솔을 하나로 붙여 다 같이 둘러앉았다.


우럭 도다리 문어 물회 모처럼 푸짐하게 시켰습니다. 총무역을 맡고 있는 박종태가 양손에 한치회 두 접시를 직접 들고 와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술자리 흥을 돋웠다. 김용식이나 김학선보다는 나이어린 후배 박종태가 히죽히죽 웃으며 술잔을 돌렸다.


김용식은 일부러 김학선 옆에 앉았다. 김학선은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누구보다도 김용식이와 의견이 같고 기질도 서로 잘 통하다 보니 주로 둘이서만 술잔을 주고받으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어느새 방파제 끝에서부터 어둠이 거뭇거뭇 몰려오고 있었다. 다들 거나하게 취했다. 이경덕 형과 배종수형은 바다 쪽으로 쭉 뻗은 방파제 끝으로 걸어가며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아서얼 때에며언 악을 써가며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김용식이도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취해서 그냥 방파제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 누워서 보니 동해바다 꼭대기 하늘에 별이 무진장 많다. 별들이 다 모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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