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가슴이 이끄는 곳] 1부. 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
[스페인, 가슴이 이끄는 곳]
1부 - 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
1-12. 스페인 교환학생 버킷리스트: 한국어 안 쓰기
*BGM:: La cintura - Alvaro Soler*
내가 교환학생으로서 말라가에 머문 기간은 단 6개월이었다. 그 마저도 다른 유럽 국가 여행이나 스페인 도시를 돌아다니느라 딱 '말라가'에서만 보낸 기간은 4개월 남짓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꽤나 짧고 굵게 그 시간을 보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 문화에 스며들 수 있었다.
또한 교환학생을 가기 전, 한국에서 미리 '교환학생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갔다. 그중 0 순위는 '한국어 안 쓰기'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꾸던 해외 유학을 드디어 이루는 순간인데 단 1초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가득 찬 교환학생 생활을 보내고 싶었고, 언어에 대한 욕심이 가장 큰 나는 짧은 반 년동안 최대한의 언어 실력 향상을 목표로 했다. 그래서 현지에 가서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들과만 어울리겠다고 다짐했다.
출국을 앞둔 어느 날. 작별 인사를 드릴 겸 학부의 한 친밀한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당찬 내 포부를 말씀드렸더니 돌아오는 말은, "보통 처음에는 그렇게 노력하다가 결국 다 편한 한국인들끼리 뭉쳐서 다니던데?"
나도 알았다.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은. 그러나 불가능이란 없다는 내 신조에서 아직 시도도 안 해봤는데 이런 맥 빠지는 말은 용납할 수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나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간 말라가에서 나는 학과에서 같이 간 한국인 동기 오빠를 제외하고는 정말로 늘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렸다. 도착하자마자 혼자 환영 파티에 가서 친구들을 사귀었고, 시간이 조금 지나 결이 맞는 친구들끼리 뭉쳐 단짝 무리까지 만들었다. 벨기에, 독일, 한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유일한 한국인인 나. 참으로 글로벌한 우리였다. 보통 한국에서도 한 번 무리가 형성되면 대부분 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듯이 나 또한 그랬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더욱 한국인을 사귈 기회조차 없었다.
그 밖에도 여행이나 파티를 갈 때마다 새로운 외국인들에게 먼저 다가가 친구를 만들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다져진 '인싸력' 덕분에 내 별명은 어느덧 타칭 '글로벌 인싸'가 되었다. 한 번은 한 스페인 친구에게 너 같은 한국인은 처음 본다는 말까지 들었다. 보통 대부분 교환학생들은 주로 한국인들끼리 다니거나 낯가림이 있던데 너는 왜 그러냐고 장난식으로 묻길래 나도 웃으며 농담조로 답했다. "나 이제 스페인 사람 다 됐지?"
어느 날은 친구들과 펍에서 웃고 떠들고 있는데, 한 편견 없는 스페인 남자가 다가오더니 내게 "너 여기 출신이니?"라고 묻기도 했다. 나와 친구들은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사실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해외의 어느 도시를 가든 그곳의 현지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며 온전히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가 여행하는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실제로 나는 여행을 하며 내 장단점들을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도. 그런 내가 스페인 출신이냐는 오해를 받았으니 기쁠 만도.
또 내가 지갑과 휴대폰이 동시에 없어서 며칠간 집에서만 지냈을 때, 한 이탈리아 친구가 펍에서 만난 모르는 한국인에게 '크레이지 코리안 파티걸' 소식 아냐고 묻기도 했다는 후문.
무엇보다 나는 한국인, 나아가 동양인에 대한 몇몇 부정적인 편견을 깨부수고 싶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고정관념은 더욱 심했다. 그들은 수줍고 얌전해. 그리고 늘 무리 지어 다녀. 그렇지 않니?라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를 봐. 아니지? 그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야."라고 주장했다. 한국인도 그 누구보다 흥이 많고 잘 놀 줄 아는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 버킷리스트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말라가에서 친해졌던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한국인과 처음 어울려보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한국인이 더 이상 낯가림이 많고 조용한 민족만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을 테지.
이렇게 밖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와서도 최대한 영어나 스페인어로 된 매체만 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외국어가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니 어느 날부터는 꿈도 영어로 꾸기 시작했다.
단 한 가지 내 교환학생 생활에서 아쉬웠던 점을 꼽으라면 스페인어보다 영어가 더 늘었다는 아이러니이다. 교환학생 가기 전, 몇 달간 기본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가긴 했으나 터무니없이 부족한 기초 실력이었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 친구들과도 더 편하게 소통을 하고 싶어 영어로 대화를 했었다. 같이 어울렸던 대부분의 유럽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처지였기에 당연히 영어로 소통했고. 그래도 영어 회화 향상을 얻어 갔기에 만족한다.
결국 나는 '한국어 안 쓰기' 버킷 리스트를 달성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부분'이 아닌 '특별한' 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래도 덕분에 달성에 대한 승부욕이 더욱 불타올랐으니 감사해야 하려나?
최근에 유입되신 분들을 위해 짧은 공지이자 구독 팁을 드리고 싶어 글을 덧붙여요. :)
- 현재 연재되고 있는 1부(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는 '2018년 8월 ~ 2019년 2월'까지의 기록입니다.
저는 2021년 10월 부로 지금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직장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어요.
- 매 에피소드마다 BGM을 상단에 적어두고 있어요. 글 내용과 어울리는 '스페인어 노래'를 엄선한 테마곡이니 음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시면 더욱 생생하게 읽으실 수 있어요!
제 소중한 추억을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내어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통하고 공감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 댓글도 언제든지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그럼 다가오는 가을도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시길 바라며 작가의 말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