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유내강(外柔內剛):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나 속은 곧고 굳셈.
우리가 흔히 유들유들한 표정과 배려심 넘치는 태도, 그러나 단호할 땐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 말로는 강강약약. 강한 사람 앞에선 강하고, 약한 사람 앞에선 약하다는 뜻이다. 의미가 어찌 되었든 약자를 보호하고 나쁜 놈들을 처단할 수 있는 굳센 의지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전달된다.
요즘 세상살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당연하게도 외유내강은커녕 강약약강에, '내 기분 상해죄'를 들먹이며 자기중심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지구 혼자 쓰나.. 싶은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의 정답은 나의 말이고, 내 행동이 정의고,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신감은 무엇일까? 그런 태도만큼은 본받고 싶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다양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환경은 크게 외부환경과 내부환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외부환경은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날씨와 같은 자연, 사회적 조건, 타인의 행동 등을 뜻한다. 반면 내부환경은 온전히 나만의 생각, 태도 등을 말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환경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고, 눈치를 본다. 그렇게 강약약강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태어난 것이다.
내부환경은 내 마음가짐을 통해 쉽게 바꿀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건들지 못하는 외부환경을 불평하고 통제하기 위한 노력을 하다가 결국 수용하게 된다. 단순히 내가 어떠한 긍정정인 반응을 위해서라면 내부환경을 바꾸면 된다. 하지만 그저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물론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건, 그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원시의 시대, 나약한 인간은 나를 위협하는 야생동물과 하루하루 식량을 구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살아남았다. 당장 눈앞에 먹을 고기가 있더라도 마냥 행복할 수 없다. 다른 동물이 빼앗으러 올까, 방심한 나를 위협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지고 경계한 것이다. 그러면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그 당시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생존요소다. 다만 문명화를 이루면서 이 본능은 쓸모가 없어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았다고,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까. 자연스럽게 기쁨과 행복을 느끼면 좋으련만 고통과 실패를 먼저 떠올리는 중이다. 남들에게 강하게 보여야 위협당하지 않을 것이고, 가진 게 많아 보여야 괄시당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없어도 있는 척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없지만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없어 보이는 타인을 무시하게 된다. 결국 남들은 나를 치켜세워주는 하나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나는 외유내강이던 강약약강이던 그저 나를 온전히 보일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잔디밭에 드러누워 뒹굴거리고 있어도, 새벽 주택가를 홀로 걸어가고 있어도 배려받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이왕 태어났으니 내가 바라는 세상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어떤가. 그저 '남들은 이런데 너는 왜', '남들이 이러니 너도'라는 타인의 시선 즉, 외부환경을 위해서 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외부환경을 바꾸려는 하나의 몸짓일 수도 있다. 그리고 외부환경은 통제되지 않으니 그에 따른 허망함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부환경을 바꿔 내가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게 우선이겠다. 하지만 평생을 이렇게 살아오다 보니 나를 위해 나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변화 대신 두려움을 선택한다고 한다. 실패를 걱정하며 도전을 망설인다. 이러한 두려움이 쌓이면 그 안에 갇혀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내 나이가 몇인데'라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나이에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에 더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스무 살에 대학에 가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인 듯 취급하고, 서른 살에 새로운 꿈을 찾아 도전하는 사람을 보고 현실을 모른다며 비웃는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 만연한 패배주의적 사고 또는 같은 길을 가지 않으려 하는 사람을 배신자로 낙인찍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창한 노력은 아니고 예를 들어 흔히 말하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통해 뇌를 속이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긍정의 힘을 주고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믿음을 주면 뇌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을 보인다. 번지점프를 할 때에도 누구나 뛰어내려도 죽지 않음을 알 것이다. 하지만 누구는 뛰어내리고, 누구는 주저앉는다. 나를 믿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연현상을 이겨낼 수는 없다. 그렇기에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역주행하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폭풍 같은 현실에서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벽을 세우거나, 안전한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은 온전하게 나의 힘이다. 결국 내가 그 흐름을 인정하고 나를 변화시키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구분되는 게 아닌가 싶다. 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세상을 살기엔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 한 발 내딛는 사람과 그대로 서있는 사람은 서로 다른 결과를 보일 것이다. 수긍하되 순응하지 않는 삶은 행복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