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분필에 숨겨진 기술
by 엔너드 EngNerd
#분필 #칠판 #점선 #드르륵 #호핑 #역채터 #마찰 #마찰공학 #공학 #과학 #기술 #과학기술
요즘 컴퓨터와 디스플레이로 수업을 할 수 있는 스마트 교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수업은 칠판-분필이 근-본 아닌가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분필로 많이 장난치며 놀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칠판에 분필로 드르륵거리며 점선을 그려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특히, MIT 물리학 교수인 윌터 르윈(Walter Lewin)은 점선 그리기를 잘 활용한 강의로 유명합니다.
한편, 공학자들은 이 현상을 진지하게 연구했습니다. 여기에 공학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죠. 이번 글에서는 분필에서 발견한 과학기술을 탐구해 보았습니다.
먼저 분필로 어떻게 점선을 그렸는지 떠올려 봅시다. 먼저 분필 끝을 가볍게 잡은 후 칠판에 수직이 되게 갖다 댑니다. 그리고 분필이 선을 그리는 방향으로 향하도록 살짝 기울여줍니다. 즉, 분필과 칠판이 이루는 각도가 둔각이 되게 합니다. 분필 각도를 일정하게 유지한 채 분필을 누르며 선을 그립니다. 이때 분필을 살짝 잡아서 분필이 약간 움직일 수 있게 해줍니다. 조건이 잘 맞으면 분필이 튀어오르는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분필이 다시 칠판에 닿을 수 있도록 칠판 방향으로 약하게 힘을 줍니다. 그러면 분필이 튀어 올랐다가 다시 칠판에 닿는 움직임을 반복하는데, 이것이 짧은 주기로 반복되면 드르륵 소리와 함께 점선이 그려집니다. 이런 현상을 분필 호핑(chalk hopping)이라고 합니다. 이 글에서는 쉽게 분필 점프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분필은 왜 튀어 오르는 걸까요? 칠판에 평행한 방향으로 분필에 힘을 가해 움직였는데 말이죠. 분필은 선을 그리는 동안 칠판에 의한 마찰력을 받습니다. 마찰력은 분필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힘으로서 분필 이동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죠. 하지만 칠판에 평행한 방향으로 마찰력이 작용했음에도 칠판에 수직한 방향으로 분필이 움직였습니다. 뭔가 아이러니하죠?
2018년 캘리포니아 주립대(California State University, Fullerton)의 기계공학 교수인 존 샌더스(John W. Sanders)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분필 점프 현상을 구현하고, 이것이 역채터(reverse chatter)에 의한 현상임을 밝혔습니다 [2]. 역채터는 처음에 지속적으로 접촉한 두 물체가 진폭이 증가하는 일련의 충돌을 통해 접촉을 잃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공을 가슴 높이에서 떨어뜨리고 공이 멈출 때까지 위아래로 튕기는 것을 본다고 합시다. 공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면에서 떠오르는 높이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 정지하는 채터(chatter) 현상을 보입니다. 이와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지면에서 더 높이 떠오르는 경우를 역채터(reverse chatter) 현상이라고 합니다.
역채터 현상은 마치 에너지가 무(無)에서 생성되어 물리학 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칠판 위의 분필의 경우 분필을 미는 손으로부터 에너지를 받고, 마찰에 의해 칠판과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충돌, 즉 충돌 없는 충돌(impact without collision)을 일으킨 것입니다 [2]. 이 충돌이 점점 커지면 분필의 움직임 진폭이 커지고 어느 순간 분필이 점프하는 것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역채터 현상으로 인해 분필은 칠판에 점선을 남깁니다.
마찰로 인해 분필이 칠판과 충돌을 일으킨다는게 아리송하다면 그건 아마 중학교 때 배운 마찰력 개념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마찰력을 칠판에 평행한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과학자들이 마찰에 의한 힘을 제시한 여러 모델 중 하나일 뿐입니다.
위 그림은 마찰을 일으키는 두 고체 표면 사이를 확대하여 나타낸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매끈한 표면도 확대해서 보면 위 그림처럼 울퉁불퉁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두 표면에서 일부만 닿아 있고, 이것이 마찰을 일으킬 때 기계적, 열적, 전기적 현상 등 다양한 물리 현상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마찰력 개념의 한계는 분필 점프 현상을 이론적으로 분석할 때 역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위의 그림처럼 평면 위에 막대가 있는데, 한쪽 끝이 면에 접해있고 일정한 힘을 받고 있는 시스템을 생각해 봅시다. 이때 막대가 면에 평행한 방향으로 아몽통-쿨롱 마찰 모델(Amontons-Coulomb friction model)*에 따른 마찰력을 받고, 마찰 계수가 충분히 높다고 가정합니다. 일정 시간이 지난 막대의 움직임을 시뮬레이션해보면 하나의 고유한(unique) 결과가 아닌 여러 가능성이 나오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데요. 즉, 막대가 면에 접촉하거나 떨어지는 등 여러 경우의 수를 가질 수도 있고(부정; indeterminancy), 어떠한 움직임도 있을 수 없는 결과일 수 있습니다(불능; inconsistency)**. 따라서 막대가 다음에 어떻게 움직일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 페인레브 역설(Painlevé paradox)이라고 합니다 [3]. 페인레브 역설은 마찰 계수가 4/3일 때 나타난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경우 마찰 계수가 1을 넘지 않는 것을 볼 때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페인레브 역설이 나타난 것은 가정이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시스템 조건과 아몽통-쿨롱 마찰 모델이 너무 단순해서 현실에 적용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만일 더 정밀하고 현실적인 가정을 한다면 페인레브 역설은 해결될 것입니다***.
* 아몽통-쿨롱 마찰 모델(Amontons-Coulomb friction model)에서 마찰력은 가해지는 하중의 크기에 비례한다. 건조한 환경에 적용된다.
** 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막대가 받는 힘의 평형식을 세운 뒤 나오는 미분방정식의 해는 이론적으로 여러 해(solution)를 가질 수도 있고(부정; indeterminancy), 해가 없을 수도 있다(불능; inconsistency) [4].
*** 참고로 존 샌더스(John W. Sanders)는 분필 점프 현상이 페인레브 역설(Painleve paradox) 때문이 아니라 역채터(reverse chatter)에 의한 현상임을 밝혔다.
결론적으로 분필로 칠판에 점선을 그릴 수 있는 이유는 분필과 칠판 사이의 마찰로 인해 충돌이 발생하고, 역채터 현상에 의해 충돌 진폭이 증가하여 분필이 점프하기 때문입니다. 마찰이 분필 점프 현상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죠.
공학적인 관점에서 마찰은 매우 중요한 현상입니다. 마찰 공학(tribology)이라는 학문이 있을 정도죠. 마찰이 복잡한 현상인 만큼 마찰과 관련된 문제와 이를 극복한 기술도 많이 있는데요. 이건 기회가 되면 차근차근 풀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EngNe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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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해당 글은 유튜버 사물궁이 잡학지식*에게 의뢰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에 감사드립니다.
* 146만 구독자를 보유한 사물궁이 잡학지식은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를 전합니다.
1. Brogliato, B., & Brogliato, B. (1999). Nonsmooth mechanics. Springer, London.
2. Sanders, J. W. (2018). Could Chalk Hopping Be Caused by Reverse Chatter?. In Dynamic Systems and Control Conference. ASME : https://doi.org/10.1115/DSCC2018-8906
3. Champneys, A. R., & Várkonyi, P. L. (2016). The Painlevé paradox in contact mechanics. IMA Journal of Applied Mathematics, 81(3), 538-588. : https://doi.org/10.1093/imamat/hxw027
4. Leine, R. I., Brogliato, B., & Nijmeijer, H. (2002). Periodic motion and bifurcations induced by the Painlevé paradox. European Journal of Mechanics-A/Solids, 21(5), 869-896. : https://doi.org/10.1016/S0997-7538(02)01231-7
5. Vakis, A. I., Yastrebov, V. A., Scheibert, J., Nicola, L., Dini, D., Minfray, C., ... & Ciavarella, M. (2018). Modeling and simulation in tribology across scales: An overview. Tribology International, 125, 169-199. : https://doi.org/10.1016/j.triboint.2018.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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