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 서랍 속의 글 꺼내보기.
마흔 살.
아들 후야는 아홉 살.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시점에 한 동짜리 작은 빌라의 2층 집을 매매했다.
서울의 고층 아파트 전세를 벗어나, 연고도 없는 경기도로 이사를 왔다.
남편이 아는 사장님이 빌라를 분양했는데, 신축 빌라를 싸게 매도하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곳에 가지는 않았지만, 경기도에 터를 잡은 계기가 되었다.
운명처럼 발길이 닿은 곳의 작은 집은 채광이 좋고, 작은 개울이 보이고,
길 건너 아카시아 나무가 아름드리 어우러져 정서적으로 이끌렸다.
그 동네 엄마들은, 같은 돈으로 학교 앞 아파트 전세를 들어가지
왜 구석진 골목으로, 그것도 빌라로 들어갔냐고 했지만,
난 그 집이 너무 좋았다.
처음으로 가진 우리 가족의 집이었고, 작고 아담하고 밝고,
동박새와 아카시아 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아이의 학교 가는 길은 개천 길을 따라 벚나무가 무성하고,
비가 온 뒤면 아이는 달팽이를 도로에 나오지 못하게
풀숲으로 넣어주느라 바빴다.
초등학교 시절 6년을 그곳에 보낸 후야.
합창단, 유소년 야구. 축구, 수영, 동물사랑단, 천문 대원,
방송부, 영재반 등등등...
밤. 낮 가리지 않고, 주말은 더 바쁜 체험의 나날을 보냈지만
외향성이 짙은 아이는 웬만해선 지치지 않았다.
딱 마흔이 되던 그해.
뚜벅이 생활을 청산하고 운전을 시작하면서
아이에 대한 뒷바라지는 전국구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아역 모델, 단역 배우를 하기도 해서 매니저 엄마의 새벽 출동은 잦았고,
펜싱 특기생이 된 것도, 아이가 아홉 살에 몇 달간 체험하게 해 준 것이
그 시작이었다.
주변의 학부모들은 뭘 그런 것까지 시키냐고,
힘들게 다른 동네로 나가고 힘들지 않냐며 걱정하듯, 유별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냥, 내가 체험하게 해 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이가 어릴 적부터 칼 놀이를 심하게 좋아해서!
하필, 나의 태교가 드라마 '주몽'으로 이루어진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아이가 유아 체능단 1년을 졸업하고도 꾸준히 이것저것 종목을 바꿔가며 운동을 하도록 도운 것은,
아이가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다.
작더라도 건강해지기를, 민첩해지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덕분에 아이는 엉덩이가 매우 가벼운 깐돌이 캐릭터로 지냈다.
마흔 살의 나는,
작은 집일지언정, 나의 둥지가 생겼다.
작은 차일지언정, 운전대만 잡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시점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동네 사람들, 학부모들과도 어울리면서
마음의 문도 서서히 열고 있었다.
작은 빌라에 입주해 먼저 반상회부터 열었고,
작은 차를 타고 아이를 전국구로 모시고 다녔다.
경주 국립 박물관의 오전 도슨트를 듣기 위해,
새벽에 출동한 일도 있었다.
내 마흔은
경기도에 산 지 2년 차,
정을 쌓아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 2022 어느 날. 20,30,40대를 회고한 작은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