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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소예 Oct 21. 2022

서른 살의 나

추억 - 서랍 속의 글 꺼내보기.

나는 지금 저녁을 먹고 눈이 가물가물하다.

며칠째, 잠을 설쳤고 아이는 펜싱 대회 원정을 떠났다.


어제는 스포츠 마사지사가 되어 굳어버린 아이의 몸을 계속 주물렀고,

내 몸은 오늘 만신창이다.

그래서, 오전에는 찜질방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시에서 지원하는 북바인딩 수업에 참여하고 싶어서 

최대한의 밝음을 장착하고 출동했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생각.


30...

두 번 다시 30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데..     


가장 외로웠고, 우울하고, 무기력했지만!

아이 교육만큼은 열성이 있었던 그 시간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르메르디앙 호텔 갤러리에서 본 문구.

"삶에는 시기별의 주안점이 있다"     


10대, 20대, 30대, 40대..

그래! 내 삶에는 시기별의 '죽음'이 있었지.     


저 문구를 접했던 그날도, 

곧 죽음을 맞이할 동네 언니가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외출한 날이었고,

마지막으로 갤러리에 방문한 날이었고,

마지막 생일 파티를 호텔에서 화려하게 했다.     


난 아이를 키우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뜬금없이 심리학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집단 상담 수업에 참여했던 어느 날.


어릴 적. 자매와 같이 놀던 놀이터에서,

담벼락이 무너져 여동생을 잃어버린 멤버가

교수님의 제안으로 나를 깊이 안아주고 있었다.     


나의 10대의 결정적인 죽음 체험은 이모의 교통사고이다.

지금은 내 모든 예상을 뒤집고, ‘엄마의 우울의 근원’을 

그 사건으로 인지하고 있다.     


이건 집단 상담 때 얻은 깨달음이다.


그 한의 정서가 나에게 남아있었고, 이유 모를 상처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게 비슷한 상처를 품은 사람들은 상처의 시간을 뛰어넘어, 

운명처럼 치유의 포옹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매를 하루아침에 잃은 엄마.

우리 엄마의 인생은 아주 오랫동안 외국에 나간 남편의 부재.

홀로 어린 삼 남매의 양육과 시어머니의 고된 병시중으로

전쟁 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흥이 넘쳤고, 웃고 있었다.


맏이인, 내 나이 스물하나까지 가면을 쓰고 버티느라

우리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30대.

고작 아이 하나 키우면서 세상의 무거운 짐은 다 짊어진 듯

매일 진이 빠졌었는데..


엄마는 얼마나 오래 힘들고 외로웠을까?

나의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아프기 시작한 엄마는 곧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 30대의 시작은 아버지의 투병 생활.

아버지마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0년 간격으로 이모가 떠났고, 엄마가 떠났고, 아빠가 떠났고. 

친정 언니처럼 집밥을 나누던 동네 언니마저 암으로 

그렇게 모두 떠나가 버렸다.     


마음 약하고, 거절 못 하는 우리 엄마.


아빠도 외국 가고 안 계신대, 큰 며느리가 버린 시어머니를  

둘째 며느리인 엄마가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할머니는 엄마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병자성사를 받고, 천주교 묘지에 묻히셨다.     


하지만, 큰딸은 마흔이 넘어서야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정성으로 모셨던 할머니를 병시중하다가 떠나보낸 황량함보다

이모가 떠난 게 더 큰 충격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하고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이런 사연으로, 집단상담 시간에 자매를 잃은 그녀는 마치 

자매를 잃은 엄마를 안아주듯 나를 대신 포옹한 것이다.     


누구나, 깊은 우울에는 깊은 뿌리가 있는 거다.


난, 그런 엄마를 민감하게 느껴서였을까?

그 정서가 나를 지배했을까?     


연고도 없는 서울.

아파트 14층에서.     

마음 나눌 친구도 없이 살면서,

내 우울과 무기력이 너무 깊었다.     


그걸 떨쳐내기 위해서였을까?     

아이와 한겨울에도 축구를 하러 뛰어나갔고, 

미술관이며 체험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교육열이 높은 게 아니라, 바쁘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육아서적에 몰입하고, 독서지도를 공부하고,

심리학을 공부하고.     


결국,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를 버티게 할 무엇이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     


아이 앞에서는 늘 웃고 있었지만,

매일 아침의 해가 버거웠고, 싫었었다.     

열정을 가장한 우울.


30대의 긴 그림자이다.     


- 2022. 어느 날, 지나간 20,30,40대를 회고한 작은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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