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나, 진짜 나

진짜를 만나면, 끝없던 의심이 모두 용서되어 버리거든요

by 연Yeon

서영님에게


언젠가 성격에 대한 줌 세션을 하다가 이런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요. 자신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고요. 솔직하고 그것이 용기 있다고요. 그 말을 해준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서툰 분이었어요. 맞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이 편지를 연재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그런데요, 저는 저를 드러내는 게 힘들지 않지만 어떤 부분에선 철저히 감추려고 해요. 저 자신조차 외면한달까요. 스스로를 잘 드러내기에 저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모든 제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한 거죠.


그러니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수밖에요. 제가 외면해 온 면모와 비슷한 것을 타인에게서 보게 되면 그것이 연인이라도, 가족이라도 거부하게 되었어요. 서영님의 언어로 바꾼다면 무지의 영역을 외면해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나조차도 수용하지 못한 그 영역을.


그 기저에는 완벽하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은 저 자신에게 기대하는 높은 기준이 있어요.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고요. 바보가 되는 것이 싫었거든요. 농담도, 내가 망가지는 것도, 코메디도 모두 멀리하면서. 언제나 멋지고 똑똑하고 깔끔한 사람이길 원하면서.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저와 동등한 위치에 두지 않으면서요. 나에게 기대하는 그 기준을 타인에게도 그대로 갖다 댔으니까요.


지난 편지에 상대의 무지를 탓한다는 서영님의 문장에서 어떤 날의 제가 떠올라요. 얼마나 오만한 사람이었는지. 그것에 아주 부끄러움을 느껴요. 제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눈치챘는데도 그것을 멈추지 못해요. 그러면 스스로를 쉬이 미워하게 되어요.


사랑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긴다고 말하지만 제 안에 자리한 이 오만함을 알아채고선, 사랑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거 있죠.


홀로 있을 때에만 그 무지를 잠깐 꺼내요. 그 외에는 얕은 거짓들로 나를 꾸미고 숨겼어요. 언제나 진짜 내 모습보다 더 과장해서 나를 소개했고요. 진실이 언제 들통날까 조마조마했죠. 그럴듯하게 나를 포장했던 날들. 잘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하며 무지를 감추던 날들. 그렇게 넘어가면 겨우 안도했어요. 여기저기 구멍 난 채로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계속 붓고 있었던 거죠.


그런 걸 생각하면 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진짜 나를 드러내도 괜찮다는 믿음, 안심. 그걸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길게 연애를 이어가지 못했던 것도 가족들과도 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였을까요.


누군가가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하면 무서워요. 제가 겹겹이 둘러싸맨 껍질을 하나하나씩 벗겨버릴 때면요. 거부감이 들고요, 혼자이고 싶어져요. 저는 그 껍질들을 아주 치밀하게 설계할 정도로 똑똑하진 않거든요. 그래서 언젠간 드러나버리고, 드러날 것이란 걸 알아버리고 도망쳐버리죠. 외려 화를 내기도 해요. 가시를 세워서 더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요. 잠깐 용기를 내 온기를 느꼈다가도 더 익숙한 외로움과 공허함 속으로 돌아와요.


근데 그 잠깐의 온기가 눈물 나게 따뜻해서요, 요즘 제 삶에서 만나게 된 관계들 속에서는 조금 달라지려 하고 있어요. 이미 마음이 다쳤고요, 또 누군갈 다치게도 했어요. ”내가 이런데도 날 받아들일 수 있어?“하며 먼저 선수치고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고요. 오래된 버릇을 어찌 하루아침에 고치겠어요. 그래도요, 부끄럽고 무서워 덮어버린 그럴듯한 포장을 걷어내려 해요. 낭비하는 하루를 보냈으면 그랬다고 얘기하고요. 잘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해요. 단순하고 명확하게 표현해요. 포장 없이 뱉어버린 말이 얼마나 산뜻한지 조금씩 실감하고 있거든요. 솔직하고 명징한 대화가 가진 무게를 이제는 알거든요.


이 편지도 역시 그런 과정 중에 하나예요. 서영님과의 대화도 그렇고요. 낙원에서의 모든 순간순간이 그래요. 몇 번을 미끄러지고서야 건너선 안될 돌다리라는 걸 아는 저이지만요, 그렇게 쌓인 확신은 쉬이 스러지지 않으니까. 진짜를 느끼는 순간을 조금씩 더 자주, 넓혀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진짜와 가짜 사이의 간극이 사라질 거라 믿으면서요. 그런 날에 닿으면 얼마나 완전할까요.


방금 좋아하는 드라마를 하나 끝냈어요. 역시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죠. 세 개의 시즌 끝에 주인공들은 과거의 상처를 마주 봐요. 괜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말하고요. 인정하지 못했던 나를 받아들여요. 멋지고 이상적인 마무리였어요.


그치만 그건 드라마니까, 우리가 사는 삶과는 아주 다를 테죠. 화면에서 보여주지 않은 길고도 먼 시간을 견디고 슬퍼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을 아주 간편하게 보여준 것이니까요. 그럴 때면 삶이 야속하다가도 그 모든 여정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이 삶이 고맙기도 하네요. 고통도 내 것이라 기쁘다고 했던 서영님이 떠올라서요.


우리 이 편지, 기한을 두지 않았잖아요. 극단의 통합을 이루게 되는 날, 온전함을 되찾는 날까지 가보자고요. 그때에 이 편지들을 다 읽고 나면 어떤 기분일까요. 해피엔딩의 드라마 하나를 끝낸 기분일까요? 더 벅차오를까요? 전 아마 서영님을 깊이 안고 싶어질 것 같아요. 어떤 말보다도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요.


2023년 6월 21일

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