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쓰다가 현타 온 이야기
말레이시아에 있는 장애인 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였다. 그곳 교장 선생님이 유럽의 자원봉사자들을 데려오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학교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다수는 미얀마, 태국 등 같은 동남아 지역의 봉사자였지만, 덕분에 늘 두어 명 정도는 유럽에서 온 봉사자가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미얀마 봉사자 두 명이 방에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으며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두 소녀는 서로 쳐다보더니 신나게 발을 동동 굴렀다. “두 유 노 ****?” “음? 쏘리, 아이 돈 노.”
그러자 두 사람은 한동안 토론했다.
미얀마 봉사자들: 레인?
나: (레인이면 비를 말하나?) 싱어?
미얀마 봉사자들: 꺅! *&*@^#*@&^*@&#@$!@#%#% !!!!!!!
나: (...)
미얀마에서는 비가 드라마로 유명해서 정지훈이라는 본명을 중국으로 쓴 자신들의 발음으로 부른다고. 처음 물어본 이름이 그것이라고 했다. 미얀마에서 부르는 비의 이름을 가르쳐줬는데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발음을 할 수 없었고 대화를 이어갈 만큼 연예인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실은 관심도...)
연예인 이야기든, 일에 관해서든 봉사자들은 자연스럽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다. 신기한 건 비슷한 문화가 의사소통을 쉽게 만들어주는 경우가 꽤 있었다.
말레이시아인인 학교 직원들과 선생님들이 영어에 유창한 것은 아니었다. 봉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경우 직원이나 선생님들이 영어로 설명해야 했는데, 한 선생님이 “그렇게 하면, 죽음이야.”라면서 자기 목을 긋는 흉내를 냈다. 심각하지 않은 내용으로, ‘이건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뜻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녀의 설명에 나를 비롯해 아시아 봉사자들은 가볍게 웃어 넘겼는데, 유럽 봉사자들은 무슨 뜻인지 몰랐고 계속 질문이 이어졌다. 선생님과 봉사자들은 그 말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점점 대화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대한 장벽을 느꼈고, 선생님은 한숨을 짧게 내뱉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의 직업은 참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나름 선진국에서 왔기에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들이었다. 경험도 없고 봉사자여서 책임질 일을 줄 수 없지만, 상사가 데려왔고 그녀의 수업에 배정되었으니 어쨌든 할 일을 주어 우리가 ‘쓸모 있어 보이기’라도 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쓰다가 갑자기 현타가 왔다.
어디나 먹고 살기는 참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