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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n 17. 2023

어머니, 대담한 늑대

어느 순간 억압되어 있는 에너지가 폭발했다. 그들은 자유를 향해 투쟁했지만, 그것을 너무 뒤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심각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불성실, 사회적인 배척, 감금, 광기 그리고 죽음이란 대가 말이다.

- 필리스 체슬러 지음, 임옥희 옮김, 『여성과 광기』, 위고, 2021, 105쪽    


어머니는 답답함을 풀기 위해 산에 간다고 말했다. 산에 가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 놀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지하철 카드와 보온병, 김밥 두어 줄이나 사과 한 알, 전날 시장에서 저녁 시간에 떨이로 서너 팩을 살 수 있는 떡 같은 것을 배낭 가방에 넣은 채 온종일 산속에 있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산에 가는 일에 매우 진지했고, 2013년 무렵에 시작한 그 일은 2018년까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산은 어머니 일상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다. 매일같이 다니던 산행이 어머니의 육체를 튼튼하고 활력 있게 만들었다. 특히 어머니는 젊음이란 것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이었다. 아무도 어머니를 육십 대로 보지 않았고, 실제로 그녀는 육십 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생리를 하고 있었다. 

산은 어머니로 하여금 야생성을 깨닫도록 해주었다. 산은 대담한 늑대와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그 늑대에 매혹되어 야생의 아이처럼 그 속을 활보하고 다녔다. 이따금 나 역시 그런 어머니를 따라 산행을 다녔다.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면 어머니는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도 매일 만난 사람처럼 친숙하게 말을 섞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이 많았다. 

어머니는 산속에서 자유를 찾은 듯했다. 산속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다. 산속에서 그녀는 현실의 문제를 놓아버리고 결박된 고통에서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어머니와 내가 가장 만만하게 다닌 산행은 아차산-용마산 코스였다. 아차산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한 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그 산의 정상에서 서울 동쪽 도심을 휘감고 흐르는 한강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나 저 멀리 구리대교를 지나는 강물의 유장한 흐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머니 덕분에 한겨울 산속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눈 쌓인 나뭇가지에 바람이 불면 그 나뭇가지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들을 털어내며 눈앞에서 은가루들이 너울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바윗돌이나 죽은 나무 기둥의 둥치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걸터앉아 김밥을 먹고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막걸리의 알싸한 향과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시리게 했다. 그때부터 막걸리와 함께 먹는 김밥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었다. 어머니와 도봉산을 등반할 때 그 등산로 입구에서 팔던 김밥은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참치나 멸치, 돈까스 같은 것을 넣은 게 아닌 기본 김밥에 오로지 깻잎 한 장으로 향취를 더한 그 김밥 말이다. 서비스로 단무지 대신 무가 들어간 김치를 봉지에 담아 주는 그런 김밥집을 어머니는 잘도 찾아내었다. 등산에 관해서라면 이제 어머니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어디에 가면 맛집이 있고 어디로 가면 가파른 경사로가 아닌 둘레길로 갈 수 있는지, 산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하는지, 아이젠은 어떻게 착용하는지, 어느 길로 내려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모든 것을 아는 그녀는 능숙하게 나를 이끌고 다녔다.      

그 산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몸이 살아 있으며 들끓는 심장처럼 욕망이 여전히 펄떡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짓누르던 남편과 아들의 존재보다 중요한 자신이 여자이며, 인간임을 산은 알게 해주었다. 산은 어머니의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의 모든 열정, 정념, 분노, 증오, 슬픔, 회한 같은 것을 모두 산에 쏟아부은 뒤 정갈해진 마음으로 도심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산이 어머니를 품어주었다고 생각했으나, 어머니가 그 산을 힘껏 껴안지 않았던들, 어머니는 진작에 용암과 같은 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스스로를 불태우고 말았을 것이다. 산은 어머니의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주었다. 그 산에서 어머니의 뚜렷한 욕망의 실체를 깨닫게 해준 한 명의 남성을 만나지 않았던들, 어머니는 생의 환희, 기쁨, 행복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그 남성을 쳐다보던 눈빛을 기억한다. 그 남성 앞에서 화사하고 동글동글하게 피어나던 모습을. 어느 날 나는 길거리에서 그들의 밀회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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