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소연 Jun 20. 2023

잿더미와 부서진 뼈들 (2)

그 남자는 내 어머니의 마음의 심연을 모두 이해해 주었을까? 내가 길에서 목격한 그 남자의 모습은 어머니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이 전부였다. 아버지에 비해 장신의 몸에 다부진 골격의 그 남자. 그 의문의 남자로 인해 나는 자주 미궁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 남자가 내 아버지가 해주지 못했던 것을 어머니에게 해주었을까? 어머니는 그런 처연한 위로 따위는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그 남성의 젊은 육체를 탐하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육체가 탐해지고, 자신의 육체가 한 남성을 탐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생에서 귀한 생명의 약동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의 정신 속 암말은 그 남자와 함께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벽을 향해 함께 전력 질주했다. 절벽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 남자는 멈추었고, 내 어머니는 멈추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내가 처음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은 기찻길에 뛰어들어 죽은 안나 카레니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브론스키가 기차역 창고의 탁자 위에 눕혀진 안나의 시신을 보았을 때의 그 광경. 그는 안나의 시신을 두고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탁자 위에 뻗어 있던, 조금 전까지 생명으로 충만했던 피투성이 육체”라고 말했다. 나는 ‘무참’이란 말을 그때 이해하게 되었다. 여성이 금지된 열광과 정념, 광기에 빠져들면 어째서 이토록 참혹한 처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단죄한 죄인이었다. 

무엇이 어머니를 죄인으로 만들었는가? 왜 어머니는 좀 더 뻔뻔하면 안 되었는가? 왜 이기적이면 안 되었는가? “나는 그를 사랑해! 나는 여자야! 사랑받고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라고 외치면 왜 안 되는가? 그 모든 사랑이 환상임을 알고도 그것에 대해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래, 또 한 환상이 사라졌군. 지나가는 구름처럼”이라고 말하면 왜 안 되는가? “그래, 나는 버림받았지. 그가 나를 버리고 떠났어.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라고 말하면 왜 안 되는가? 이런 말 대신 그녀는 “내 몸은 그의 피부 속에, 심장 속에 스며들어 사라졌는데, 그가 떠난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이 치욕스러운 껍데기, 육신만 남았구나! 욕정에 눈이 멀어 내 핏물과 진물까지 모두 더러워졌구나! 그렇지만 난 여전히 그의 정액이 그리워. 퉤! 더러운 년! 미친년! 죽어라, 죽어!”라고 외쳤을 것이다.

내 어머니의 몸은 정념의 화염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녀의 시신이 화장될 때 그 불의 열기 옆에 서 있던 나는 그녀의 관짝 속에 함께 들어가 누워 있고 싶었다. 그 불타는 고통을 나는 함께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는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대신 그 잿더미와 그 부서진 뼈들을 수습하여 그것을 질료로 삼아 글을 쓴다. 

어머니의 유골함은 기독교식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오빠의 바람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오빠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오빠를 찾아가 교회의 목사를 만나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오빠에 의해 갑자기 ‘교인’이 되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어머니는 정말로 종교에 귀의하고 싶었던 것일까? 종교의 힘을 빌어서라도 내 어머니가 살아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종교에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종교는 내 어머니를 살리지 못했다. 종교는 어머니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더욱 강하게 할 뿐이었다.    

가정도, 종교도, 윤리도, 법도 지켜내지 못한 내 어머니의 삶은 어디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어두운 밤이면, 나는 망자의 목소리가 되어 떠도는 내 어머니의 외침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었어. 이렇게 죽고야 말았어. 나를 잊지 말아줘! 내 목소리를 들어줘. 내 삶은 끝나지 않았어! 나는 아직도 그곳의 삶이 그리워. 나를 이곳으로 내치지 말아줘! 나를 잊지 말아줘!”

나는 밤새도록 그 울음소리를 듣다가 어머니의 삶을 양지 위로 끌어내기 위해 동이 터오는 새벽이면 이 글을 쓴다. 새들이 울기 시작하면 그 울음소리는 영혼의 투명한 울림이 되어 빛의 세계 위를 떠돈다. 그 떠도는 소리를 붙잡아 나의 단어 한 자 한 자에 그녀의 영혼이 실리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염원이 나를 매일 책상 앞에 앉도록 한다. 어머니는 평소에 글이란 것을 전혀 읽지 않던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살아 있다면 이 글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부재하는 지금 이 글은 떠도는 울부짖음을 받아 적은 것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통해 그녀의 삶을 재건하고 있는 셈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