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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n 14. 2023

사랑은 넘쳐흐르는 노래가 되어

내 삶은 고통이에요. 낮엔 삶이 나를 죽이지만 밤이면 내가 삶을 죽여요. 나는 여왕이 될 거라 기대했는데 이제는 구걸밖에 할 줄 모르지요. 근사한 사랑을 하며 살려 했는데 추한 상처를 입고 죽어갑니다. 그렇긴 해도 난 이곳에 무사히 존재해요. 피폐해진 내 삶 속에 온전히 존재하는 내 생명 탓에 고통스럽습니다. 나는 성근 잎사귀들 속에 넘쳐흐르는 노래로 죽어갑니다.
 
-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숨겨진 삶」, 『작은 파티 드레스』, 1984Books, 2021, 84쪽   


어머니가 세 명의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둘째로 태어난 나는 어머니가 가진 교육열에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세 아이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바쳤기에 어머니는 낮에는 우리들을 돌보는 삶이 그녀를 죽이고, 밤에는 고단한 몸으로 잠 속으로 미끄러져 자신을 죽였을 것이다.

내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4년간 개고기를 손질했던 어머니는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와 서울행을 감행했다. 그들은 서울 동쪽 끝 암사동 시장 입구에서 식료품 도매상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동창이 먼저 이곳에 터를 잡고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의 도움을 받아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동창은 십여 년 장사를 하고 가게를 접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 장사를 삼십 년 가까이 하게 된다. 서울에 온 초기에는 가게 뒤에 마련한 창고를 개조한 방 한 칸에서 우리 식구들은 모여 살았다. 샤워 시설도 변기도 없었고 수도꼭지만 있는 방 한 칸. 밤에는 천장 위로 쥐들이 우르르 뛰어다녔다. 뒷방의 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나가면 변소가 있고,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는 팔다 남은 음료수며, 반품 들어온 라면, 과자, 초콜렛 박스가 즐비하게 쌓여 있었기에 쥐들이 번성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떤 날은 마당 한 구석에서 하얗게 말라 비틀어 죽은 쥐새끼를 발견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집 천장이 뚫려 무너져 있었다. 불법 개조물이라 하여 시에서 나온 사람들이 강제 철거를 한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세 아이들을 아버지의 동창이 사는 아파트 집에 임시로 맡겨 두고 다시 집을 수리하여 우리를 데려오기 일쑤였다. 철거하면 다시 지붕을 올리고 하는 식으로 이 일은 여러 해 반복되었다.

지독히도 곤궁한 생활에도 어머니의 삶에 대한 열의는 이 시기에 가장 왕성하고 의지에 찬 것이었다. 무엇보다 시골에서 올라온 우리들의 공부가 서울 아이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공부에 심드렁했지만, 어머니의 성화에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공부에 소질이 있던 오빠는 어머니가 보내는 모든 수학, 영어, 국어 학원에 성실히 다녔다. 아버지는 한량 시절을 접고 맥주짝, 소주짝, 라면박스 열댓 개를 등허리에 져 트럭에 싣고 소매상인들에게 배달하는 일을 십수 년간 하게 된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살림을 꾸린 덕에 우리는 가게 뒷방이 아닌 연립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거실도 있고, 깨끗한 욕조가 있는 화장실도 있으며, 여동생과 내가 쓸 방도 생겼다. 그 거실에는 알록달록한 붕어 몇 마리가 든 어항도 놓이게 되었다. 아버지는 잉꼬새 두 마리도 사다가 놓으셨다.

이 시기부터 어머니의 교육열은 완전히 불을 지피게 되었다. 세 아이에 대한 이 열정은 ‘넘쳐 흐르는 노래’가 되어 그녀의 삶을 독식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행복한 고통’ 같은 것이었다. 특히 나와 오빠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우리를 특수목적고에 보내기 위해 엄청난 교육비를 쓰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공부에 심드렁하면서도 학원에는 꼬박꼬박 나갔다. 그것은 학업에 대한 열의보다 어머니의 열의에 대한 동조였다. 나는 외국어고등학교에, 오빠는 과학고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우리는 학원에서 편성된 특별반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들어간 교육비는 상당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학교에도 학원에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돈봉투며 백화점 상품권도 상당한 양으로 챙겨주곤 했다. 대형학원에서 개최하는 입시설명회에도 그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참석했다. 아버지는 허리가 휘도록 번 돈이 모두 교육비에 투입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체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수금해서 받아온 돈이 가게 카운터에 쌓이면 어머니는 그 돈 일부를 학원비나 선생님들의 용돈을 챙겨줄 목적으로 뒷주머니에 꽁쳐두곤 했던 것이다.

이런 삶이었기에 나는 어머니가 여유롭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을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에 지나치게 사교적이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이였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장사 수완을 발휘해 손님들을 끌어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어머니와 내가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 그 골이 깊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우유부단함이 없이 결단한 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이였던 반면에 나는 매사에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주변의 눈치를 보는 아이였다.

어머니가 하루 중 가장 차분해지는 시간은 저녁 시간에 가계부를 쓰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산술 계산에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었고, 경리로 일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능숙하게 주판알을 튕기거나 계산기를 두드릴 때에는 경외심마저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버리지 않은 유일한 유품이 검은색 가죽으로 싸인 양장 가계부였다. 나는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어머니가 얼마나 성실히 그날의 하루를 기록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꽁치 3천 원, 우유 2천 원, 두부 한 모 천오백 원, 콩자반 3천 원, 떡 3팩 5천 원, 애들 아빠 담배 2갑 5천 원, 토마토 4천 원, 병원비 6천 원, 약값 8천 원, 은행 이자 2만5천 원, 전기세 3만8천 원, 도시가스비 5만 원, 수도세 3만 원, 첫째 학원-과외비 90만 원, 둘째 학원비 30만 원, 막내 학교 육성회비 10만 원… 어머니는 자신의 일상의 모든 것을 숫자로 기록하고 있었다. 가계부 쓰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계속된 기록이었다.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녀의 교육열은 더욱 가열차게 되어서 오빠와 나의 교육비는 개인 과외까지 붙게 되면서 더욱 불어나게 되었다. 안 그래도 공부에 심드렁했던 나는 과외를 받은 지 1년이 채 못 되어 도망쳤기에 나의 수업은 중단되었으나, 공부열이 있던 오빠에게로 과외 수업이 집중되면서 어머니의 모든 열정이 그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서울대에 재학 중인 과외 선생님에게 오빠의 수업을 3년 내내 맡겼고, 과학 성적이 떨어지면 과학 수업도 맡겼으며, 과외 선생님의 생일도 챙겨 주면서 따로 용돈도 챙겨주게 되었다. 나의 경우 고2 때부터 학원과 과외를 모두 강력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에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독서실은 나에게 비밀스러운 성소가 되었다. 불이 꺼진 공간에 작은 책상 하나, 그리고 스탠드 하나, 음악이나 영어 듣기를 할 수 있는 미니카세트와 씨디 플레이어만 있으면 나의 공간은 완성되었다. 나는 스스로 내 공부를, 내 성적을 통제하고 있는 점이 좋았다. 그러다 성적이 조금 오른 적이 있었는데, 내가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자 그녀는 왜 등수가 이것밖에 오르지 않았느냐고 더욱 혼낸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1, 2점 차이로 등수가 오르내릴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며 성적에 목매는 아이가 되었다. 성적은 내 세계의 전부가 되었다. 어떤 날은 성적이 반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는 척을 했다. 어머니는 나의 연기에 놀라 담임선생님에게 전화하고 그와 상담까지 받고 돌아왔다. 담임이 말하기를 당신 딸은 상처를 아주 잘 받는 아이라 염려된다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그 말을 전했으나, 내가 어머니의 따뜻한 칭찬이나 인정에 목이 말라 있었고, 가혹한 몰아붙임에 상처받은 사실은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 역시 이에 대해 더 깊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교육열은 세 명의 자식이 모두 대학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의대에 진학하려던 오빠는 의대 합격 통지서를 받고도 인체 해부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사범대로 급선회하였다가 대학에 낙방했고 재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에 나는 사립대학에 입학했고, 같은 해에 오빠가 사범대에 입학했다. 동생도 1년간 재수를 한 후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세 자식의 대학등록금과 재수 학원비, 생활비를 대느라 어머니와 어버지는 자신들이 버는 모든 돈을 쏟아붓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에게는 이 시기가 인생에 있어 ‘희망의 상승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자식 모두를 대학에 보낸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그 결승선을 향해 세 마리의 경주마를 통제하는 노련한 조련사와 같았다. 자기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지거나 탈출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제도 안에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한 결과, 자신이 몰입할 만한 과업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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