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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n 13. 2023

고통의 기원과 역사

불행은 부처럼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이지만, 그 모든 것은 소모하는 데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그녀의 고통은 아주 오래전 선조 대에서 시작되었을 테지만, 나는 이 여인의 조상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병은 결코 원인이 아니다. 병은 고통에 맞서기 위해 고안해내는 가련한 답이다. 나는 답을 알았다.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우울증’과 그 시대에 부족했던 약, 그리고 빈약한 의학 지식 때문에 그녀의 병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 이유도 모른 채, 나는 사진 속 여인에게서 힘과 빛을 끌어낸다.  

-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그리움의 정원에서』, 1984Books, 2021, 104~105쪽


어머니의 죽음 이후, 나는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자신의 고통에 맞서왔는가를 헤아려보게 되었다. 어머니의 고통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통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나의 외할머니는 특별한 정신질환을 앓으신 적 없이 집안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고교 시절의 어머니와 함께 찍은 흑백 사진 속의 외할머니의 눈은 어쩐지 슬프고 맑은 눈을 가졌다. 노인의 눈이라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연하게 동그랗고 투명한 눈망울. 그리고 그 깨끗한 조약돌 같은 눈을 어머니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외할머니가 사십 대 후반에 어머니를 낳으셨기에 사진 속 어머니는 고등학생의 앳된 얼굴, 외할머니는 칠십 줄에 접어들고 있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이 두 여성의 극적인 대비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양쪽으로 포개지는 두 개의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두 개의 역사가 하나의 시공간에, 하나의 이미지로 포착되어 화석처럼 남아 있었다. 그 두 줄기의 시간이 펼쳐지는 것을 살아 있는 현재의 내가 바라본다. 

사진 속의 두 여성들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이들이 되었다. 외할머니를 이 세상에 다시 호명하기에는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녀가 여덟 명의 자식을 출산했다는 것뿐이다. 그중 마지막으로 태어난 아이가 나의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바로 손위 언니는 생후 1년을 채 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이다. 외할머니는 끝없는 출산의 고단함 속에, 내 어머니는 자신의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에서 그치게 될까 봐 기꺼이 집을 떠나는 삶을 살았다는 것. 외할머니는 집안을 돌보는 삶에서 떠나지 못하셨지만 내 어머니는 집 밖으로의 탈출을 결행했다는 것. 조금이라도 제 어머니의 삶보다는 나아지고자 안간힘을 다했던 한 여성의 삶이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선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결혼이 자신의 불행의 시작점이라 늘 말해 왔다. 집안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나게 된 즈음에 어머니는 어떤 군인과 연애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군인과의 만남이 얼마나 설렜는지, 그와의 헤어짐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종종 내게 얘기하곤 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구애에 어머니는 모종의 사건(바로 오빠를 임신하게 된 그 사건)을 겪고 그 군인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뒤늦게 약속 장소에 갔을 때 군인은 어머니에게 아주 긴 편지를 남겨 놓고 떠났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다른 갈림길로 들어선 것을 직감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결혼을 한 시점부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인생을 걸어왔다기보다 ‘피해자의 인생’으로 들어섰다는 논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최종 학력이 고졸이 아닌 초졸이었고, 시어머니는 일찍이 과부가 되어 여섯 남매를 키우며 하숙생을 치느라 드세고 억센 사람이 되어 어머니는 그의 폭언에 시달리는 삶이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에게 늘 ‘속아서 결혼했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 생활 초기에 원주에 살면서 아버지가 출판사 외판원을 하던 시기에는 가난하지만 이따금 치악산에 소풍을 가는 단란함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횡성에 사는 친할머니 댁과 살림을 합치고 식당을 운영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불행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횡성으로 내려가 개고기 장사를 시작했을 때 그들의 나이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식당 뒷마당에서 죽은 개의 잔털을 불에 그슬리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한다. 어머니가 그 고기를 삶아 함지박에 담아놓고 온종일 뼈에서 살코기를 발라내던 모습도, 식당 안을 가득 채우던 들깨, 마늘 냄새와 미나리, 깻잎, 쑥갓 냄새도. 그 조그만 오두막 같은 시골 식당에 기이하게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외판원 시절에 다 팔지 못한 명화 도록들을 수당을 채우기 위해 본인의 돈으로 산 다음 간직하고 있던 것을 낱장으로 뜯어내 액자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식당 안에 마련된 한 칸짜리 방에서 우리 다섯 식구는 살았다. 나는 그 방 한 칸의 벽에 붙여진 한글 배우기 포스터를 보며 한글을 떼고, 어머니가 수시로 틀어놓은 구구단 암송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구구단을 떼었다. 

젊은 나이에 식당 일을 시작한 어머니는 아름다웠다. 식당을 드나드는 남성들이 수시로 어머니에게 군침을 흘렸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보호하기에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무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식당 일을 잠시 도울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한량으로 지냈다. 어떤 날은 수시로 돈을 꾸러 오던 어린 시동생이 어머니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으려 달려들었다. 식당에서 술을 마시던 한 남자 손님은 병아리와 놀던 나에게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병아리를 자기 입 속에 넣은 다음 입을 벌려 버둥거리는 병아리를 내게 보여주었다. 남자의 혀 속에서 축축하게 젖어 몸을 비트는 병아리. 식당은 어머니에게 자유도, 안식처도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궁지에 몰려 갇혀 있는 암탉처럼 때로 지치고 무기력하게, 때로 창백하고 무참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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