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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05. 2023

몸, 수치심과
욕망과 혼돈의 텍스트

나는 어렸을 때 마루인형에 집착하는 아이였다. 일곱 살 무렵에 경기를 일으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온종일 마루인형을 가지고 혼잣말을 하면서 좀처럼 심심해하지도 않고 노는 모습이 신기했다고 한다. 나와 같은 반이었던 말 못 하는 친구가 내 인형보다 예쁜 마루인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인형을 가지고 놀기 위해 그 아이의 집을 주기적으로 놀러 갔다. 나는 그 친구가 말을 할 줄 알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날은 그 인형을 내 옷 속에 몰래 숨긴 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서 한동안 가지고 논 다음 다시 돌려다 놓기도 했다. 나는 그 친구가 그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인형은 내 분신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언제고 버리고 싶고 바꿔치기하고 싶은 존재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정성껏 옷을 입히고 빗질을 하고 머리를 땋아주고 씻겨주고, 어떤 날은 바닥에 패대기를 치기도 하고, 방구석 어딘가 처박아 두기도 했다.

마루인형은 ‘마론인형’이란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마론이란 이름의 미스 유니버스의 명칭을 부여받은 인형이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마루’로 변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금발의 플라스틱 인형은 한국 여자아이의 손에 들어가서 애정과 혐오 사이를 전전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형을 씻기려고 옷을 벗기면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이상했다. 젖꼭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형의 가슴은 딱딱했고, 허리는 잘록했고, 다리는 길고 가늘었다.

초경을 시작한 열네 살 무렵에 나는 더 이상 마루인형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대신 내 다리는 왜 길고 날씬하지 않은지, 엉덩이는 왜 작고 봉긋하지 않고 오리 엉덩이 같은지, 머리칼은 왜 가지런하지 못하고 쭉쭉 뻗치는지 등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모님의 수입이 안정되면서 우리는 각자 방을 가지게 되었고, 한방에 모여 살던 때 주기적으로 나를 추행하던 삼촌들도 더 이상 방문하지 않게 됐다. 그렇지만 내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젖꼭지가 부풀어 오르고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때 겪은 일들이 불러일으키는 알 수 없는 혼돈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내 손에 닿던 그 뜨끈하고 축축하고 딱딱한 물체의 촉감이 내 뒤통수에 찰싹 달라붙어 밤마다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밤에는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서 강간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나는 예쁘지 않은 내가 미웠고, 예쁜 여자애들을 보면 질투하면서 선망했다. 나는 내가 예쁘지 않은 것에 고민하다 밤늦은 시간에 청소년 상담센터에 전화를 건 적이 있다. 그러면서 내가 털어놓은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제 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한쪽으로만 뻗칠까요?” 상담사가 건네준 조언은 아주 단순 명쾌했다.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면 돼요.” 나는 상담사에게 내 몸이 부끄럽고 불결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결국 말하지 못했다.      


여성의 몸을 누출하는 몸, 피 흘리는 몸, 호르몬과 번식 기능에 휘둘리는 몸으로 부호화하는 관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여자들의 몸은 통제되지 않고, 팽창하며, 새어 나오고, 배어 나오는 더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 캐롤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욕구들』, 북하우스, 2021, 204쪽  


수치심이란 공기에 휩싸여 있던 중학생은 성년이 되면서 자신의 몸이 힘이 될 수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혹독한 다이어트로 자신감이 오르면 남성들의 시선을 받기도 하고, 맘에 드는 남성을 유혹할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남성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섹스를 아주 좋아하는 여성이 되어야 했고, 그런 연기도 펼쳐야 했다. 그러다 연애가 잘 풀리지 않으면 자기혐오와 무력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 무렵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든 나는 불안 공황장애를 앓기 시작했다. 6개월간의 상담과 약물 치료 끝에 의사는 내게 가장 원하는 일을 하라고 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내 몸에는 여전히 어떤 관능의 씨앗의 남아 있었지만, 그 실체가 사랑받고 싶은 갈망인지,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인지 모를 모호한 안개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파리에서 돌아와 삼십 대에 접어든 나는 연애에 더욱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여성이 되어 있었다. 늘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이십 대의 암울함을 벗어던진 멋지고 쿨한 여성이 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연애가 진창으로 바뀌고 있는 어느 밤에는 와인병을 길가에 들고 나와 깨뜨린 적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랑받기에는 모자란 여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파주출판도시에 살던 삼십 대 중반의 어느 주말에는 파주의 고요와 적막과 안개에 진저리를 치면서 버스에 뛰어올라 단숨에 이태원까지 가서 처음 보는 남성들과 밤새도록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길거리를 쏘다녔다. 마치 내 삶에 거리낄 것은 없다는 듯이, 어떤 남성도 유혹할 수 있다는 듯이, 밤의 활보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삼십 대 후반, 어머니의 자살로 나는 모든 부적절한 연애 관계에서 나 자신을 단절시켰다. 그 시기의 나는 건강한 연애와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내 몸에 새겨진 수치심과 자기혐오의 뿌리를 완전히 해체하기까지 내 몸은 유폐와 단절과 황무지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징벌의 시간을 선고한 것이다.

사십 대가 된 나의 몸은 기약을 알 수 없는 애도와 감금의 시간으로 들어갔고, 육체의 기쁨보다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세상과의 연결감을 찾으려 했다. 일하는 현장에서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작가, 번역가, 선배, 동료, 후배 들을 만나게 된 것은 이 일이 나에게 선물한 유일한 기쁨이었다. 일이 주는 성취는 슬픔과 상실, 공허함을 잊게 해 주었다. 그렇지만 조직 생활이 주는 환멸은 생각보다 큰 것이어서 내 몸을 짓누르고 숨을 쉬기 곤란하게 하는 때가 많았다. 일을 하다 답답해지면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심호흡을 하다 나오곤 했다. 내 몸은 점점 지하로 꺼져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어서 금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금요일 퇴근 후 저녁에는 맛있는 요리를 손수 차리고 와인을 마시며 영화를 보는 게 내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영화는 내 공허의 훌륭한 도피처였다. 영화관의 어둠과 환상의 빛은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래서 내 영혼은 영화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적막과 그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마음의 심연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지도, 들여다볼 여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나는 스크린을, 노트북 화면을 주시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다른 세계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것은 나를 황홀하게 했다. 영화가 내 마음을 마음껏 휘젓고 희롱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영화는 가장 안전하게 이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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