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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06. 2023

암흑을 들여다보는 연습

영화 <베네데타>(2021)


부산영화제에서 <베네데타>를 보았을 때, 신과의 영원한 접속을 원하는 베네데타의 몸과 정신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바라보는 일은 나를 흥분하게 했다. 그녀는 자신이 성녀라 믿었고, 주장했고, 자신의 성적 환영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열망임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보여 주었다. 또 다른 수녀 바톨로메아를 사랑하는 일은 그녀 자신의 욕망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가장 금욕적인 공간인 수녀원에서 베네데타와 바톨로메아는 그들이 가진 욕망의 끝을 실험했다. 그들은 육체로서 서로의 거울이 되어 주었다.  

    

명명될 수 없는 범죄는 문자 그대로 이름을 갖지 못했고 역사의 기록에도 거의 적을 남기지 않았다. 서유럽인들이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지니고 있던 모순적 관념은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에 관해 무엇이든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침묵은 혼란을 낳았고, 또 혼란은 두려움을 유발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거의 지난 2000년 동안 유럽 사회는 뚫을 수 없는 견고한 장벽을 만들었다.    

 - 주디스 브라운 지음, 임병철 옮김, 『수녀원 스캔들』, 푸른역사, 2011, 45쪽


베네데타 까를리니는 종교 심문을 받았고, 재판을 받은 뒤 수명이 다할 때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그녀의 욕망은 영원히 감금되었고, 명명할 수 없는 범죄로 기록되어 1623년 피렌체 국립문서보관서에 봉인되었다. 

나는 사방이 장벽으로 둘러싸인 나의 몸을 바라본다. 그 몸은 누구도 탐구하지도 밝히지도 않은 영역이며, 기이한 상흔 또는 상형문자를 지닌, 아무도 읽지 않은 텍스트다. 그 텍스트는 오직 나만이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내 몸은 사람을, 세상을, 자연을, 우주를 만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텍스트다. 내 몸의 실존은 아주 구체적인 기억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탱고를 추려면 상대에게 내 온몸을 기대야 한다. 기대서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상체의 한 팔로는 상대의 등을 감싸고 한 팔은 나란히 맞댄 채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심장을 맞댄다. 이 모습은 마치 사람 인人의 형태를 띤 트라이앵글을 이룬다. 상대를 신뢰하지 않으면 이 삼각의 균형은 무너지고 만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해 상대를 대할 경우 상대의 심장 박동을 온전히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가벼워져야 한다. 나의 기억으로부터, 아픔으로부터, 상실로부터. 대신 그가 내 몸에 기댈 수 있게 온몸을 열어젖혀야 한다. 상대와 함께 호흡하고 함께 걷고 함께 방향을 튼다. 상대의 숨결 속에 내 숨결이 스며들고, 내 숨결 속에 상대의 숨결이 스며들 때까지. 그럴 때 온전한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밀롱가에서 낯선 상대를 만났을 때, 오로지 그의 몸짓을 통해서만 그의 모든 것을 읽어내게 된다. 그것은 그의 외적인 면모가 말해주지 못하는 영혼의 텍스트에 대한 것이다. 그가 따뜻한 사람인지, 차가운 사람인지, 쓸쓸한 사람인지, 낙천적인 사람인지, 쇠락해 가고 있는 사람인지, 기쁨에 가득 찬 사람인지…….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은 온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내 몸은 여전히 변화하는 중이고, 연습하는 중이다. 감금과 유폐의 감각으로부터 서서히 문을 열고 다시 세상을 깊이 호흡하며 받아들이는 연습을. 나의 촉각으로 세상을, 삶을, 암흑을 움켜쥐고 만지고 들여다보는 연습을. 그 안에 천둥벌거숭이 내 몸이 있다. 우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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