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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n 10. 2023

내 딸이여,
시간을 초월하는 운명이 덮쳤소

아버지와 내가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는 몇 달 동안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거나 옥상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후로 몇 년간 내가 옥상에 올라간 것은 겨울에 수도가 동파되었을 때 수리기사와 함께 올라간 것으로 단 한 번뿐이었다. 내 방문을 나서면 거실을 가로질러 삐걱거리는 오래된 나무 계단을 밟고 옥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계단은 내가 오르기에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언덕과 같았다. 

어머니의 방에는 형형색색의 등산복이 즐비했다. 응급실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입고 있던 옷도 등산복이었다. 병원 봉투에 담겨 있던 어머니의 그 샛노란 등산 점퍼. 진회색 바지…. 그것을 그대로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어머니의 물건에는 손을 대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대신 아버지가 그녀의 모든 물건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의 등산복과 배낭, 스틱, 등산화, 간이 돗자리, 장갑, 모자, 손수건, 보온물병, 오래된 한복, 외출복, 겨울 코트, 속옷, 핸드백, 운동화, 빗, 화장품, 염색약, 머리끈, 목걸이, 거울 등 그녀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어머니의 이 모든 유품을 정리하는 데는 꽤 시간이 들었는데,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완전히 외면했다. 대신 아버지는 이 유품을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물건을 하나 하나 버릴수록 그를 짓누르는 부재와 상실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진다는 주문에 걸린 듯이.       

어머니는 60대에 접어들면서 등산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서 매일같이 아차산, 용마산, 수락산, 북한산, 관악산 같은 서울 전역의 산들을 차례차례 등반했다. 이따금 산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울 밖의 산으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내가 퇴근할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던 길의 어머니와 이따금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면 저 멀리서 노란색 점퍼에 등산 모자를 쓴 작고 둥그런 여성이 걸어오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녀의 실루엣. 길에서 만나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 때가 있었다. 산에서의 구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등산복은 도심 한복판에서는 지나치게 밝고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 그녀를 아는 척하지 않고 지켜본 적도 있었다. 동네 카페에 앉아 테라스 밖을 내다보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녀는 어떤 남성과 함께 걷고 있었다. 나는 그때 어머니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에게도 이제야 삶의 기쁨이나 몰입이 될 만한 어떤 사건이 생겼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겼다.

나는 짐짓 모른 체하면서 어머니와 대화 중에 “엄마도 다른 남자 만날 수 있지 않아? 어차피 아빠는 사랑하지 않잖아” 하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녀는 불같이 화내면서 집안의 수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내가 놀란 지점은 그녀가 이미 다른 남성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보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였다. 그녀는 거짓말을 할 때면 눈빛이 흔들리고 표정이 굳어버렸기에 그녀가 몹시 큰 괴로움에 빠져 있구나, 하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외도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겪게 될 수모와 낙인이 그녀로서는 가장 두려운 공포였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모두 걸고 지키고자 한 비밀이었기에 나는 여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나의 말소리가 어머니의 영혼에게까지 들린다면 그 영혼은 나를 휘감고 통곡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 나는 말해야만 해요!”라고 외치는 것이다. 간통, 불륜, 외도라는 단어로 그녀에게 죄의 낙인을 씌우고자 함이 아닌, 그녀의 욕망이 어떤 과정으로 비틀리고 왜곡되어 갔는지, 그것이 어떻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욕망을 없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 욕망을 양지의 빛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육신과 그 영혼이 품었던 삶의 열망에 대해 예의를 다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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